북한이 새롭게 펴낸 김정은의 위인전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 전략이었던 남방외교와 전방위외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021/02/1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대외정책] 3. 냉전 후 북한 대외관계의 전개 및 외교 노선의 변천 (1)

 

이번 포스팅에서는 북한의 전방위외교 수행 이후 불거진 2002년 북핵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6자외교와 신북방외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6자외교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인해 북한의 전방위외교 전략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 등으로 인한 남북한 간 화해·협력 무드는 2007년까지 지속되었고, 

북일관계 개선 노력 역시 200년대 중반까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탈냉전 외교의 핵심이자 북한 외교의 궁극적 목표인 대미외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탈냉전 후 국제 질서는 미국의 패권 하에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미외교의 쇠락은 곧 전방위외교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와 더불어 북중·북러 관계 역시 2000년대 초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정체되었다.

 

대미외교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북한이 상대해야 하는 미국 정부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핵문제를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접근하였는데,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북한과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문제에 접근했다.

이 접근에서는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북한의 핵 위협을

미사일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고자 하였다.

 

부시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비핵화를 정권 붕괴 혹은 그에 걸맞은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로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한편,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 핵포기 후 보상'이라는 일방적 비핵화를 내세움으로써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비협력적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1차 6자회담 당시 참가국 대표들의 모습. 왼쪽부터 일본 야부나카 미토리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 미국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북한 김영일 외무성부상, 중국 왕이 외교부 부부장, 러시아 로슈코프 차관, 한국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 출처: 연합뉴스

 

※ 6자회담(Six-Party Talk)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개최한 다자회담.

2003년 8월 1차 회담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까지 만 5년 6개월간 진행되었다.

1~3차 회담은 탐색전 성격이 짙었고, 4차 회담에서 무려 한 달간의 집중 협상 끝에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성명 도출 직후 미국이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를 실시하면서 협상은 장기 교착 국면에 돌입하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상황이 급진전되어 2007년에는 공동성명 이행 로드맵인 <2·13 합의>와 

<10·3 합의>를 도출하였다. 6자회담은 핵문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의 맹아로 주목받았으나,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한 번도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자주의를 선호하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6자회담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전망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 별다른 성과가 도출되지 않자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했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자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수교·평화협정·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북한의 의도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기존의 반확산 강경정책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확산 정책과 함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의 시도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의 북핵문제 접근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 제공 등을 약속한 합의였다. 그런데 클린턴 시기의 <제네바 합의>와는 달리

<9·19 공동성명>은 합의 이행의 로드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로드맵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북한과 미국의 핵 처리 및 보상 문제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시각 차이로 인해 6자회담 및 공동합의는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설치의 보상과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핵무기 폐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한국의 

핵우산 폐기와 연계하여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북한은 지난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핵 보유국으로의 지위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비핵화를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는 더 간극이 벌어져 향후

<9·19 공동성명>이 가동된다 할지라도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4. 신북방외교

 

6자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장거리로켓을 시험 발사하고(2009년 4월), 연이어 

2차 핵실험(2009년 6월)을 감행했다. 핵문제 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평화협정을 일괄 타결할 수 있는 

협상판을 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의 기조로 북한에 대응했다.

즉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까지 북한의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는데, 2010년 3월 천안함을 어뢰정으로 공격해 침몰시키고 2010년 말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인 연평도에 포격을 감행했다.

이에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협상을 재개했으나 이는 문제 해결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전까지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당시의 모습. 이 포격으로 인해 우리 군 2명과 주민 2명이 사망했다. 출처: 연합뉴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내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준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여기에 호응하여 오바마 재선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이었던 

위성 발사를 미뤘으나 예상과 다르게 오바마 재선 이후 대북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되었다.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선언했고, 국방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으며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처럼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오바마 행정부 이후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북중관계는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밀착되었다.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대북정책 재검토를 거쳐 북한 문제와 핵문제를 분리하고 북한 안정화를 최우선 하는 정책을 채택하면서

북중 간 경제협력을 확대시켜 북한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는 시도를 하였다.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막힌 상황에서 북한의 중국의 관여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관계 밀착에도

신경을 썼다. 냉전시대의 북방외교와 같이 북한은 자국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그 예로써 2005년부터 나진항 개발을 두고 전개되고 있던 중러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의 활용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김정일의 대외 행보인데, 김정일은 2010년 5월8월, 그리고 2011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고, 2011년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중국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

탈냉전 후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자주 북방의 동맹국들을 방문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대화하는 김정일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한편 냉전시기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양측의 갈등상태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했었던 전략적 차원의 북방외교와

이 시기 신북방외교에는 다소 성격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냉전시기의 소련과 중국은 군사 충돌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갈등상태가

지배적이었던 것에 반해 2010년대의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협력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협력은 미국이라는 

공동의 경쟁국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저울질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반사이익은

냉전시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2010년대에 진행되었던 신북방외교는 북한의 이익 추구를 위한 외교 행보라기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생존을 위한 협력체계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탈냉전 이후 김정은 집권 전까지의 북한의 여러 외교 전략과 행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김정은 시기 외교 전략의 특징과 함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김일성-김정일주의

Ⅲ. 김정일 애국주의

Ⅳ. 맺음말


북한에서 후계자는 수령이 창시한 혁명 사상을

계승ㆍ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정은은 선대수령인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선군사상을

동렬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김일성-김정일주의’로 규정하여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는

2012년 김정은 체제의 출범과 더불어 제시된

지도이념으로, 후계 구축기간이 짧아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김정은의 리더십 구축을 위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김정은은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하였고,

선군사상을 ‘김정일주의’로 격상시켜

이를 주체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림으로써

선대 수령의 사상을 고도로 추상화시켰다

 

이번 글에서는 현재 북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김정은의 통치 담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선대 사상을 심화ㆍ발전시킨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먼저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하위 담론인

‘김정일 애국주의’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이후 김정은 담론의 한계에 대하여 짚어보며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김일성-김정일주의

 

 

2012년 4월 11일

북한은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조선노동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채택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은은 김정일의 혁명 사상을

‘김정일주의’로 정식화하였다

김정일의 총대중시사상을

선군혁명사상, 선군정치이론으로 심화ㆍ발전시키고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김일성주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김일성-김정일주의

김정일이 정식화한 김일성주의에

김정일의 이론을 합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김정은은 또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이며

주체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혁명사상”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김정은이 ‘수령의 후계자’이자

새로운 수령으로서

주체사상에 대한 해석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Ⅲ. 김정일 애국주의

 

3대 세습의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고

김정은의 발전노선에

인민대중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하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를

제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김정일 애국주의’는 2012년 3월,

전략로켓사령부를 시찰한 김정은이

“김정일식 애국주의를 높이 발휘하는 데서

인민군대가 앞장설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4월 27일,

국토의 발전과 관련된 담화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표현하였다

 

국토의 관리 및 발전을 위하여

주민들에게 사회주의적 가치보다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동년 5월의 《노동신문》에서 본격적으로

김정일 애국주의 개념이 등장한다

사설은 대중들을 위한

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강조하며,

김정일의 ‘인민사랑의 정치’를

발전시켜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용어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처럼

일정한 이론적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정일 애국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김일성-김정일주의’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대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함으로써

대중동원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애국주의의 정당성은

현지지도 강행군 중에 사망한

‘김정일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성’에서 비롯된다

 

김정일이 ‘혁명가’이기 전에

‘애국자’였던 표현을 통하여

사회주의 이념이 주민들의 결속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가 체제 결속을 위하여

주민들의 강한 ‘애국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수령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숭고한 조국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3대 승계를 정당화하고

인민대중의 충성심을 동원한다

 

수령 중심의 애국관에 기초하여

수령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애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 강조로 연결되어

김정은 체제의 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한 정치적 하위 담론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 애국주의는

숭고한 인민관을 핵심으로 하여,

위민이천(爲民以天)’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를 후대 사랑과 미래 사랑으로

그 저변을 확장하였다

 

위민이천 :: 《노동신문》김정일 전 위원장과 관련된 기사 분석 :: 북한헤럴드 (tistory.com)

 

김정일 애국주의가 강조하는 인민관과 후대관은

미래 인민생활 향상을

최우선의 가치로 둘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선군이 아닌 경제우선과 인민우선의 노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공식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선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선의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하고,

김정은의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김정은은 경제발전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김정은식 실천이데올로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 체제는 김정일 애국주의에 이어

경제를 우선하는 선경(先經)노선

혹은 선민(先民)의 김정은식 발전전략을

뒷받침할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의 제시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내세운 김정은은

혈통승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향후 이데올로기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더불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

여기에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새로운 하위 담론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김정일 애국주의로 연결되었다

 

김일성-김정일주의는

공식적으로 표방된 지도사상일 뿐

오히려 김정은 체제의 정당화와 이데올로기적 동원은

그 하위 담론인 김정일 애국주의에 의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여,

김정은의 새로운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천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 체제는

선대와는 다른 노선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새로운 담론의 제시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되며,

주체사상과 관련된 연구를 마친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일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 65-92.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39-45.

통일부 통일교육원, 『북한 지식 사전』, 통일부, 2016, pp.135-138, 147-150.

※ 해당 포스팅은 현대북한학강의』 제4장. 선군경제, 그리고 시장개혁에서 나온 개념을 참고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의 여러 경제 담론 중에

단연 유명한 담론은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제'이다. 

 

당시 다른 나라의 

일반 경제론과는 많이 다른 형태로

북한만의 특수한 경제구조를

보여주는 담론이었다.

 

오늘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가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선군경제'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1990년대의 위기


1990년대 초, 

북한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소련이 붕괴된 후에 

벌어졌던 대외관계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중국 포함한 모든 나라와의

대외교역이 금속화폐 결제 형태로 바뀌며, 

따라서 유례없는 대외무역 악화가 발생하였다.

 

수입 여력이 제일 부족했던 

에너지 부문부터 위기가 발생하였고, 

그 이후 각 부문까지 여파가 확산되었다. 

 

따라서, 원자재와 생필품에 대한 

공장 가동률이 감소하며, 

운송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에 화학비료 생산도

중단되어, 농업 생산 또한

붕괴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전 김일성 대부터 

진행되고 있던 소위 주체농법은

밀식재배를 하기 때문에 

고비료를 투여해야 했는데, 

비료 생산과 수입이 

중단되며 결정적으로 

농업 위기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위기는

식량위기로까지 확산되었고, 

배급제 또한 위기에 처하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국가 기간 사업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부문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떠났어도 자급자족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주민들은 배급제가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장이 형성되게 되었고

시장은 '생존공간'이 되었다. 

 

1993년에 시장 활성화 전략이 

모색되기 시작했고, 

시장사회주의를 허용하는 노선을

'농업, 경공업, 무역의 3대 제일주의'

라는 이름으로 어느정도

허용하였다.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자연재해 또한 겹친 국난에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단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 때, 군대 중심으로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나가고

군사부문에서 생산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조건 하에, 

민간 부문에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방식이 소위 '선군경제'라고

주창하는 경제정책 기조였다. 

 

선군경제와 함께, 

지방, 경공업 부문은 자력갱생의 

이름으로 사실상 방치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주민들은

시장을 통해 다양한 생존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선군경제'를 선택했을까?

 

이전에 소련, 중국 등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군수산업을 육성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제정책

시행해왔다. 

 

북한 또한 남한과의

체제 경쟁을 했어야 됐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 건설

노선을 수용하여

군사·경제 병진 노선을 

1966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공식채택하였고 지금까지 이 기조는

이어져 오고 있다. 

 

김정일은

'선군경제건설 노선'이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군이 앞서는 경제 노선이라는 점을

언급하였다.

 

이 경제 기조의 의도는, 

국방산업을 최우선으로 지키려는 

이었다. 

 

북한에게는, 

군수산업, 군경제가 체제유지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경제적 요소이다. 

 

따라서, 국가재원이 축소되었지만, 

그 금액들도 국방공업에 

우선 배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신문에는

위기의 근원은 수정주의, 사대주의, 일부 사회주의

배신자들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했다. 

 

또한, 체제위기의 근원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위기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그 내부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주민들에게 인내를 독려하면서

주민 동원 체제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이후, 고난의 행군이 공식 선포되고

국내 고위층의 권력 투쟁, 탈북사태에 

비판으로 대응하며 절정에 달했다. 

위의 사진은 

1990년대의 경제 위기에 관련하여

탈북에 대한 비판이나,

주민들에게 부족에 대한 인내,

자력갱생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들어간 선동글들이다. 

 

1990년대 이러한 위기상황이

계속되자, 고위층에서는 다양한 

논쟁들이 일어났는데, 

이를 김정일이 '강계정신'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종식시켰다. 

 

'강계정신'이란, 군수공업이 밀집한

자강도의 강계 주민들이 보여준

자력갱생 정신이 북한체제가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는 기본방식임을

구호화시킨 것이다.  

 

'강계정신'은 곧 

1998년 경에 시장과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황색 사조'에 맞서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역사와 전통에 의거하는 데 

북한체제의 발전의 길이 있다는

'강성대국론'과도 연결된다.

 

선군경제


북한의 정치체제는

김정일이 집권하고 나서는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시작한

북한의 정치 구호도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 부문에서도 '선군경제론'이라는

이름으로 이론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특이한 발전관이

이론화되고 정식화 되었다.

 

선군경제 하에서

자력갱생과 군중노선에 더불어,

군수산업을 최우선으로 두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시장을 군수산업의 

가장자리에 두고 잉여를 전취하는

디자인을 그리게 되었다.

 

이렇게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선군경제는 군수산업을

우선으로 둔 계획경제가 

1990년 확산되기 시작한 

시장과 자본주의에 따라

어떻게 조정될지에 대한 문제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흐름에서

선군경제가 처한 문제점은

크게 세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북한의 산업을 단지 군산복합형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중화학공업이, 기계/화학 공업 중심으로

군수산업에 계열화되어서 

군수산업과 민수산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다시말해, 

여러 분야의 산업 유형에 대해

각각의 특징에 따른 운영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수산업과 중화학공업마저

군수산업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군수산업으로 투자재원이 과도히 집중되어

민수산업의 성장이 제한되고, 소비생활의 발전도

저해되어, 민생경제가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셋째,  군수산업이 단순 국방경제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수산업의 일부로 침투되고,

민수산업을 경제적 잉여를 얻기 위한

 독자적 경제공간이라는 성격으로

변질시켰다. 

 

이에 반해, 군경제가 차지하는 영역은 더 높이게 되었다.

 

 

경제정책의 변화


북한은 1998년을 기점으로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서자, 

새로운 경제정책과 제도적 정비에 

착수했다. 

 

그 첫 단추가 바로

2002년 7월 1일에 단행되었던

'7.1 조치'이다. 

 

'7.1조치'는 가격 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정책을 시작함을 의미하는 조치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은

이전에 가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물, 즉 물건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 정책을

지향했었다.

 

※물량물동체제(스탈린식 경제체제)에 대한 내용은 이 글을 참고하면 됩니다. ※

2021/02/15 - [북한의 정태/경제] - [북한의 경제] 사회주의 경제의 메커니즘_물량물동경제체제와 부족의 경제

 

[북한의 경제] 사회주의 경제의 메커니즘_물량물동경제체제와 부족의 경제

※ 해당 게시글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 4장 선군경제, 그리고 시장개혁에서 나온 개념을 참고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이다. 이 사회주의 경제체제

thenorthkoreaherald.tistory.com

 

그런데, 고난의행군을 겪고 나서인지

당시 7.1 조치를 통해

기존 스탈린식 물량물동 경제체제를

개선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개혁 정책의 본격화라는 평가와, 

단지 사경제 부문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라는 평가가 있다.

이는 이 조치에 계획과 

시장을 동시에 강화하는 정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혁조치의 형태를 띄는 

항목들은, 물가인상, 환율현실화

기업경영의 독립성, 

노동 성과급제 실시, 각종 복지 혜택 폐기,

인센티브제 강화 등의 조치가 포함된다.

 

얼핏 보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과도 상당부분 공통점이 있는

부분들이 많다. 

 

일단, 북한은 

기존에 석탄이나 전력가격에

의해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아닌, 

쌀값기준으로 생필품 가격을 

재조정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였다.

 

또한 생필품 가격을 

정부가 정한 가격이 아닌,

시장가격 수준으로 현실적 조정을 했다.

장마당 수준으로 가격들을 조정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쌀값은 수매 가격 50배, 판매가격 550배

인상했으며, 

생활용품을 포함한 공업용품 또한 

평균 25배를 인상했다. 

 

근로자 임금은

북한에서 고급인력으로 꼽히는 탄부들 기준으로

6000원(북한돈)으로 약 30배가 올랐고

근로자 평균 임금은 약 18배가 올랐다.

 

노동의욕을 증대시키기 위해

성과급을 도입한다는 항목을 포함시켰다. 

 

교통서비스나 주택사용료와 

같은 소위 복지비용을 대폭 인상하였는데,

주택사용료에 경우 

조치 이전에는 

월 생활비의 0.3%를 부담하는 협동농장원은

무상으로 임대료를 보조해주었으나, 

조치 이후, 

평양을 기준으로 한세대 주택의

월 사용료를 78원으로 인상했다. 

 

북한의 계획경제체제의 

큰 요소들 중 하나인 협동농장에도

변화를 주었다. 

 

국영농장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토지 소유권만 국유화하는 것이다. 

대신 협동농장원에게 '토지 사용료'

받기 시작했다. 

 

이는 농업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가격지배력을

높여서 국가의 자산 지배력도 강화하려는

의도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이 시기에

식량위기를 큰 위기 요소로 생각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농업에 개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국가가 주민들을 책임진다는

가족주의 담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음은 7,1조치 이전과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고 이에 대한 

현황과 부작용이 무엇인지 

정리한 표이다. 

출처: 현대북한학 강의 

7.1 조치는 거시경제정책의 

변화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기존 물량물동체제의 

가격왜곡을 제거하고자 했다. 

 

계획기구 대신에, 

시장가격을 통해 

수요와 공급 간 괴리를 해결하여

경제를 안정화 시키려 하였다. 

 

이를 도모하려면, 

이전에 북한이 따르던 

스탈린의 저가격 정책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의 저가격 체제는

배급제와 같은 강제적 자원배분제도

국가가 지배하는 미시경영 메커니즘

그리고 거시경제삼위일체

의미한다. 

 

기존에 산재해있던 가격 왜곡, 

저가정책을 담은 거시정책을 

수정하려면 미시경영과, 자원배분제도를

변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음 도식이 

7.1 조치 전후의 삼위일체의 변화이다. 

 자원배분방식은 

현물에서 가격 중심으로,

국가가 자원을 배급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장에 의해 조정되게 두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역단위로 편재되어있었던

농장이나 공장체계는 

독립채산제에 의해 

부문별로 총회사를 세우고 

국영농장을 따로 운영하게 되었다. 

 

독립채산제란 

‘국가의 지도 밑에서

국영 공장·기업소가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경영활동을 하면서,

자체 수입으로 지출을 보장하고

국가에 이익을 주는 기업관리방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국영 농장이나 기업소가

독자성을 가지되,

국가의 사상 및 제도를 관철시키며,

회사나 농장의 자체 수입으로

지출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7.1조치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계획 경제의 다양한 메커니즘과의 

충돌을 사전에 해결을 못했고, 

외부 시스템과의 연결도 순조롭게 준비하지 못했다

단점이 있었다.

 

동등한 가격시스템하에서 

등가교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북한체제 자체가 시스템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동시에 시작된 2차 핵위기 또한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아, 

대외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며, 

공급부분이 예상보다 

뒷받침되지 못하였다

 

7.1조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단순 실패한 정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공식적,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시스템을 정상화시키기 위함이

7.1 조치의 목표였으나, 

실질적 내용은 시장경제로의 이행 요소를

내포하긴 하였다. 

 

그렇지만, 공식적 내용이

실질적 내용과 어느정도 맞는지

규명되지 않았고, 

두 요소 모두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단순한 눈으로 북한의 경제를 바라보면 안된다.

 

구획경제론


7.1 조치의 또다른 이면에는,북한이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하면서도

기존에 중시하던 국방공업을 강화하는

이중적 조치를 공표했다는 특징이있다.

 

2002년은

신의주나, 금강산, 개성 공업지구특별법 제정 등

유난히 경제개혁의 바람이 많이 불던 해였는데

동시에 '선군경제 노선'을 정식화하고

국방공업우위노선을 대대적으로

공표한 바가 있었다.

 

7.1조치에서 공언한 경제시스템개혁은

모든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계획과 명령 방식이라는

기존의 관료적 관리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는 국방공업에서는

'당-군경제'가 명확히 구획되고 있었다.

 

이렇게, 7.1조치 이후 

북한체제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거시체제로 전환했다는 이론을

'구획경제론'이라 한다. 

 

다음 도표를 보면, 구획경제라는 의미가

명확히 이해가 될 것이다.

 구획화 경제는,

쉽게 말하면 

소비재 공업, 농업, 시장과 같은

일반 경제가

'당-군경제'에게 잉여를 

탈취당하는 것이다.

 

'당-군경제'는 

'선군경제' 하에서 국방공업을

최우선으로 삼는 조치와 연결된다.

 

북한 당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국방과 관련된 사업이나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데, 

일반경제 부문에서 생산된

잉여를 쓰는 것이다.  

 

기존 중공업 중 '당-군경제'에 이익이 되는 부문과

국방관련부문을 분리해서 관리하면,

나머지 부분에 해당하는

중공업 공장들은 중복 투자의 폐해를

 피하고 규모의 경제까지 고려할 수 있다

것이 기존 의도이다. 

 

또한 경공업, 농업과 같은 일반경제는

효율적으로 시장형 변화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체 생존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

이 구획화 경제의 논리이다.

 

이런 부분들이 정상작동한다면,

구획된 틀 내에서 스스로 발전하는

'자력갱생'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 북한 경제의 규모가 커져야

중공업공장들의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 질것이고,

다른 일반경제 부문에서도

알아서 잘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길 것이다.

 

충분치 않은 자원으로

구획경제 하에서 자원을 배분하게 되면, 

구획끼리의 상호 침범은 불가피하며, 

주민들의 생존에 관한 직접적 문제가

심화된다면, 군경제가 실제 민생과 관련되는 

일반경제 부문의 잉여를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 생긴다.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제와 

구획경제는 오직 군을 위한 경제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해결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던 정책이라 볼 수 있다. 

 

7.1 조치 이후에, 

후속조치로 

계획경제 하에서 

시장을 운영하기로 한 

시장운영의 공식화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계획경제와 비공식경제(시장 등)간의 

관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기의식을 가진 

북한 당국은 2005년 하반기 

7.1조치 시행을 중단하고, 

시장을 점진적으로 통제했다. 

 

2009년에는 결국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합시장을 철폐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북한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아 

실패로 끝났다. 

 

김정일 이후에 집권한 

김정은은 화폐 개혁의 실패를 

절감하여, 시장을 적극 활용하여 

경제를 활성화하고, '돈주'들이나 

주민들의 화폐자산을 통해 

정권 자체의 업적을 선동하는데 

활용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장달중. 현대북한학강의.사회평론, 2013. pp.161-172

북한정보포털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1&dicaryId=125 (검색일: 2021.2.24.)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선군정치론

Ⅲ. 강성대국론

Ⅳ. 맺음말


1970년대를 거치면서 체계적인 사상체계의 틀을 갖춘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자성을 더해가며

북한 유일의 공식지도이념으로 공고화된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김정일은

새로운 통치담론으로

선군정치론과 강성대국론을 제시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새로운 통치담론의 등장 배경과

그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추후 김정일의 통치담론에 이어

김정은의 ‘김일성ㆍ김정일주의’와 ‘김정일애국주의’를

차례로 살펴볼 예정이다


Ⅱ. 선군정치론

 

김정일 시대 북한 정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군정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경제적 위기돌파를 위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김정일은 유례없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장기적 전략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위기를 이겨내자는 정당화와

동원의 기제를 활용해야만 하였다

 

북한의 계간지 『철학연구』 1999년 1호에서는

이를 “군대를 중시하고 그를 강화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 정치“라고 정의하였다

 

“당과 군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에 대한 당적 영도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선군정치론을 살펴보면

당과 군대는 혼연일체의 대상이지만,

결코 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군대는 ‘당의 군대’로서 당의 영도를 받는

대상인 것이다

 

당ㆍ군 관계와는 다르게 군대와 인민은

‘진정한 혁명동지’의 관계로서

대체로 평등한 위치에 놓인다

 

또한 군대에 대한 인민의 사랑과 원호를 강조하는 데서

선군정치의 핵심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철학연구』에 따르면

북한의 이론가는 정치방식이

제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과 생활력이 저절로 배양되는 것이 아니며

위대한 정치가, 탁월한 혁명의 영도자에 의해서만

높이 발휘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정치가이자

탁월한 혁명의 영도자는 곧 김정일이라고 주장한다

수령과 당에 대한 군대의 무조건적인 충실성을

강조하는 선군정치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대를 강화하는 데 선차적인 힘을 기울이는

선군정치가 북한에 등장한 데에는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체제 붕괴 원인에 대한

북한의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9년의 루마니아나 1991년 소련의 사례를 보면서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도

당이 군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하면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서 발간된

『세계를 매혹시키는 김정일정치』에서는

지난날에는 군대가 다만

나라를 지키는 국방 수단으로만 간주되었으나,

김정일이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이자

나라의 기둥으로 새롭게 규정하였다고 한다

 

‘혁명의 주력군’이라는 말은

군대를 정치체제의 중심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다

북한에서는 당을 ‘혁명의 참모부’로 간주하는데,

‘주력군’이 ‘참모부’를 영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선군정치는 군대가 당과 수령의 영도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지도와 대중의 결합’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를

정당화하는 주체사관의 기존 논리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위기극복을 위한 정치담론이었던 선군정치는

체계화 과정을 겪으며

김정일의 실천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선군사상으로의 격상을 시도하였다

 

선군사상으로 체계화하는 데는

혁명의 주력군 문제를 새롭게 밝히고

주체사상과의 관계를 논리적ㆍ이론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선군정치가 선군사상으로 격상되면서,

북한은 과거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경제우선에 머물렀으며,

선군사상은 이를 극복하고 선행이론과 다르게

“주체사상에 기초한 군사중시사상을 제시하고

군대를 강화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어야 한다는

전혀 새로운 혁명공식으로서의 군사선행,

군 건설선행의 원칙, 원리를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주체사상의 틀 안이지만 선군정치에서는 나아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상적 토대로까지 선군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미국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더욱 심화됨에 따라

북한은 선군정치에 더욱 집착하고,

이를 ‘만능의 보검’으로까지 내세우게 된다

 

김정일의 선군사상은 결국 2009년 4월

헌법 개정에서 주체사상에 더하여

공화국의 지도지침이 되었고,

주권에 관한 내용도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에서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으로

수정되었다

 

마침내 선군사상이

김정일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정립된 것이다


Ⅲ. 강성대국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간

유례없는 자연재해에 시달렸던 북한은

1998년에 들어 어느 정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대외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전개하면서

북한에서는 미래에 대하여 비교적 낙관적인

강성대국론이 등장하였다

 

강성대국론은 1998년 8월 22일자

《노동신문》 정론을 통하여 제시되었다

‘주체의 사회주의강성대국’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이 정론에서는

주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혁명적 수령관’이 강성대국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이 정론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광명성 1호’ 인공위성 로켓을 발사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강성대국 건설 구상 천명은

인공위성 발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공위성은 비록 궤도에 안착하지 못하였지만,

북한은 광명성 1호의 발사가

강성대국건설의 첫 포성’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98년 9월 8일 축제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직에 재추대되었다

 

이후에도 북한은 계속 ‘강성대국’ 건설을 강조하였으나

2012년경부터는 ‘강성국가’라는 표현이

이를 대체하는 경향을 보였다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는 ‘강성대국’과 ‘강성국가’를

혼용하고 있는데,

2013년 김정은의 신년사에서는

‘강성국가’만 사용하고 있다

이는 ‘대국’이라는 표현이 북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뒤늦게나마

고려된 결과로 보인다

 

한편 김정일 시대에 강성대국론이

주체사상을 대체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북한 현실과 괴리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붉은기사상, 선군정치,

강성대국 등이 그 대안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현실에 맞게,

그리고 김일성ㆍ김정일의 개인 절대 독재에

적합하게 수정한 고도로 정교한 논리체계인

주체사상과 일반대중을 선동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정치구호’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선군정치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김정일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북한은 경제난과 안보위협이라는

이중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군정치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위기 돌파책으로 내세운 선군정치 외에도

낙관적인 미래를 위한 통치담론이 필요하였다

그렇게 등장한 강성대국론은

수령 중심 체제를 한 번 더 강조하고 있고,

김정은 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성국가론으로 수정되었다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된 주체사상은

추상화되었고,

현실 상황에서 정당화와 동원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1990년대 체제위기의 북한에서

고도로 추상화된 정치사상 대신

현실에서 정당성을 설파하고

위기극복을 위한 노력과 의지에로 동원하는 역할은

주체사상에 뿌리를 둔 하위 정치담론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은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65-92.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9-26.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선군정치’ (접속일: 2021년 2월 22일).

 

 

'세대교체'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특정한 성향을 가지며, 같은 요인에도 다르게 반응한다.

 

이러한 인류보편적인 변화는 북한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바이며,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의 세대 구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처: the300


 

▣ 북한의 세대 구분

 

세대 혁명 1세대 혁명 2세대 혁명 3세대 혁명 4세대
활동시기 및 출생년도 항일무장투쟁 참가자 한국전쟁, 전후복구 참여자 50년대 중반~70년대 중반 출생자 7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
지도자 김일성 김일성 김정일 김정일
특징 - 정규교육 못 받음

- 사상성 강함
- 정규교육 못 받음

- 사상성 강함
- 일제폭압과 전쟁 겪지 않음

- 정규교육 받기 시작

- 김정일 당사업 개시時 출생함

- 성장기 물질적 혜택 받음
- 일제폭압과 전쟁 겪지 않음

- 정규교육 수혜자

- 김정일 후계자 확정 이후 출생함

- 성장기 물질적 혜택 받음. 그러나 고난의 행군을 겪기도 함

※자료: '김정일 시대 권력엘리트 변화', 2009년 김갑식(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김정일 시대부터 북한은 세대를 구분할 때, 주체사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와 역사 발전에서 차지하는 해당 역사적 시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 특히는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을 기본으로 하여 규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쉽게 풀어 설명해보면,

주체사상 관점에서 '1세대, 2세대는 조국을 광복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서 위훈을 세운 세대이며(1세대 2세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 3세대, 4세대는 그것을 튼튼히 고수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히 발전시키며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세대(3세대 4세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로 구분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세대 구분에서는 단순연령효과(age effect)보다 동년배효과(cohort effect)를 기본으로 하여 역사적 경험을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동년배효과(cohort effect): 일정 단위로 구분한 출생집단의 특징들을 기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효과를 말한다. 다른 시기에 출생한 각 집단은 심리, 사회, 문화적 특성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며 이를 각기 다른 동년배간의 효과라 한다.

 

북한의 이러한 세대 구분은 몇몇 부분에서 모호한 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1세대 항일빨치산 세대, 2세대 한국전쟁 참전세대, 3세대 전후세대, 4세대 고난의 행군 세대'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장마당세대(1980~90년대 출생)

 

출처: 조선중앙TV 캡쳐

전문가들은 북한의 청년 세대를 ‘장마당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1980-90년대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고난의 행군’을 겪었으며, 부모 세대와는 다른 성향을 띄고 있다.

 

장마당 세대가 부모 세대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노동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보다 돈벌이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 문화에 노출이 많이 되었으며, 시장경제 체제에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탈북민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장마당 세대가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지만 체제에 불만이 많다고 한다.

오랜 군 복무기간 성분문제가 이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이다.

북한의 군 복무기간은 10년이며, 장마당 세대는 이 기간 동안 장사를 통해 벌 수 있는 액수를 떠올리며, 자기 인생을 소모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북한은 전체 주민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 3계 계층 51개 부류로 나눴기 때문에, 이에 따라 출신 성분이 나쁜 젊은이는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해도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에 갈 수 없다.

 

현재 장마당 세대는 약 2천500만에 달하는 북한 인구의 14%에 해당되는 3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 세대교체와 간부 선발

 

출처: 연합뉴스

북한은 간부 등용에서도 세대교체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져 온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시대에는 간부 등용에 있어 출신 계급이 무엇보다 중요시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인텔리 계급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노동계급, 고농, 빈농 출신들이 간부 선발에 있어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 전문성, 능력, 학력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2006년 1월 김정일이 직접 "간부는 지식이 있어야 발언권이 서고 제 구실을 할 수 있고 공부를 하지 않아 지식이 없는 간부는 발언권이 설 수 없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지도자인 김정은과 여동생인 김여정이 서방국가인 스위스에서 유학을 한 점은 김정은 시대에는 이전 세대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이번 8차 당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조용원

이번 8차 당대회는 북한이 간부들을 대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북한 권력의 핵심체이자 절대권력기관으로서 당의 모든 정책을 수립∙결정하는 정치국(Politburo) 구성원들의 평균 연령이 5년 전 당대회 때와 비교해 9세 정도 젊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이 등용되고 중용되는 간부들에 의해 어떠한 정책의 변화가 있을지, '세대 변화 측면'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2장 '권력구조와 엘리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김당. (2021). '김정은, 북한 권력층 세대교체…9세 젊어졌다', UPI 뉴스, 1월 13일

이재원, (2018). ''N세대' 김정은, 상상 이상의 '새로운' 북한', 머니투데이, 5월 1일

최원기, (2020). '북한 '장마당 세대', 부모와 정치·경제 성향 크게 달라', VOA 뉴스, 9월 25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사회평론, 2013.

2018년 6월 싱가폴에서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출처: 연합뉴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소련의 붕괴로 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 넘게 지속되었던 냉전 체제가 와해되자 북한 또한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통일, 소련의 붕괴가 야기한 탈냉전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오랜 적대와 반목의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일견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탈냉전은 대단히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북한은 탈냉전의 세례와 긍정적 영향을 받지 못한 유일한 국가로 낙오되었다.

대한민국의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로 인해 한중관계가 빠른 속도로 밀착되면서 북한은 구 사회주의권에서도 점점

고립되어 갔다. 다시 말해 1990년 9월 한국·소련 수교와 1992년 10월 한국·중국 수교에 따른 냉전형 동맹관계의 해체는 

북한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위기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간 북한의 안보와 경제는 전적으로 소련과 중국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대한민국과의 밀착관계는 상당한 위협이었고, 북한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비대칭전력인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북한의 핵 개발은 군사적 용도로의 활용과 더불어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카드라는 

이중적 성격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로 점철된 탈냉전의 출현인 20세기 말, 21세기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북한은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현재까지 변천해왔는데, 아래에서는 북한이 탈냉전을 맞이하며 구사하였던 외교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남방외교

 

탈냉전 초기 북한의 최대 관심사는 탈냉전 후 급물살을 펼치게 된 자유·공산 진영 간 전 세계적 화해 모드 속에서의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북한이 내세운 외교적 목표는 한국이 소련과 중국에 그러했던 것처럼,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개선을 중심에 두고 남북관계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교차승인 전략인 '남방외교'였다. 

 

당시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은 한국과 일본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는 우회전략을 구상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서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워싱턴으로 올 수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미·일 3각 동맹체제에서

일본 역시 미국과 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북미관계와 북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선에서 대남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은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이는 듯했는데, 일본과는 1990년 9월 조기 국교수립을 약속한 

<조선노동당·자민당·사회당 3당 공동선언>을 도출했고, 한국과는 1990년 9월부터 총리급 회담을 개최하여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행보는 1992년 1월에 김용순 조선노동당 국제비서와 아놀드 켄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 사이의

역사상 첫 번째 북미 고위급회담의 성사를 가능하게 했다.

 

 

1990년 김일성과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왼쪽),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오른쪽)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더보기

다음은 <조선노동당·자민당·사회당 3당 공동선언>의 일부.

3당은 일조 양국간에 존재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해소하고 가능한한 빠른 시기에 국교관계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3당은 일조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각분야에 있어서 교류를 발전시키고 통신위성의 이용과

양국간 직항로 개설문제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3당은 조선은 하나이며 남과 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하는 일이 조선인민의 민족적 이익에 합치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3당은 평화적이고 자유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앞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 대하여

핵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음에 동의했다.

 

그러나 1992년 가을부터 북한의 이러한 행보에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는데, 92년 10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전기획부에서 

북한의 간첩단 사건인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하고, 같은 달 일본에서는 <3당 공동선언>의 주역인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이 대일관계의 개선 및 북일수교라는 정치적 동력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에 따라 1991년부터 진행되어온 수교 협상은 1992년 11월 제8차 협상을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만다.

 

일본과 한국을 경유하여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개선을 노렸던 북한은 북일, 남북관계가 모두 막히게 되자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목표로 과감한 핵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미국으로의 접근이 1차 남방외교였다면, 2차 남방외교는 

북미수교로 직행하려는 핵 강압 외교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외교 전략 노선 변경의 시발점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를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은 미국을 협상의 자리로 끌어 오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시도로 양국은 1993년 6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3차례의 고위급회담을 열어 

핵문제를 협상하고,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US-DPRK Agreed Framework)를 도출했다. 

 

1994년 제네바합의문에 서명하는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출처: 중앙일보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 그리고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북한을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북미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합의 이후 이행이 순탄치 않았는데, 합의 직후 미국의 의회는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고, 북한은 

김일성 사망 후 '선군혁명'에 직면했다. 양국 내부에서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제네바합의의 이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는데, 

특히 북한 내부에서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가 발생하면서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남방외교 전략은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대외관계 노선의 변경을 야기하게 되었다.

 

 

2. 전방위외교

 

1994년 김일성 사후 3년간의 유훈 통치 끝에 1998년 8월 북한 최고지도자로 공식 등극한 김정일은 대내 안정을 바탕으로 

과감한 외교적 접근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대포동 미사일 시험 발사(1998년 8월 31일)가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1998년 8월 31일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소식을 알리는 KBS 뉴스. 출처: KBS NEWS

 

이로 인해 제네바합의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했고, 페리가 의회 및 관련 부서와 조율을 거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제네바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 사회의 제재에도

북한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의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관여는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이러한 원칙을 견지한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200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내용이었다.

 

2000년 10월 김정일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난 조명록 차수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이 합의 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또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면담을 진행했으며,

북미수교를 확정 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문 일정 또한 잡히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뿐만 아니라 그간 단절됐던 북중·북러 관계 복원에도 나섰는데, 이는 1990년대의

남방외교의 성격과는 구분되는 전방위외교의 특징이 드러난 외교 전략이었다.  

 

북한은 김정일 체제 출범 직후부터 북중관계 개선에 나서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끈

대규모 대표단의 방중을 성사시켰다. 이는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이후 7년 만의 관계 복원이었다. 

이후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김정일의 방중, 2001년 9월 장쩌민의 방북으로

양국 최고지도자 간의 협의 채널이 복원되었다.

 

2001년 9월 북한을 방문한 장쩌민과 김정일의 모습. 출처: 동아일보

북러관계 역시 개선되었는데, 1990년 3월 한소수교 직후 폐기되었던 <북소 동맹조약>을 대신해 

<북러 우호선린협조조약>이 가조인되었으며, 2000년 7월에는 소련을 포함한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지도자(푸틴)이 평양을 방문했다. 여기서 양국은 <북러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침략위험이 조성되거나 평화와 안전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조성되면 지체 없이 서로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다.

이어 2001년 8월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방문, 푸틴과 함께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북러 친선협조관계를 더욱 발전"

시킨다는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난 푸틴의 모습. 출처: 연합뉴스

 

주변국의 잇따른 대북관계의 개선 행보는 일본의 대북 접근 또한 유도하였는데, 북일 양국은 1992년 이후 중단됐던 

수교협상을 2000년부터 재개하고 북송 재일교포들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어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으로 사상 처음으로 북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여기서 김정일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등 적극적인 대일관계 개선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후 2004년 5월에 열린 제2차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인 가족들을 송환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그러나 이후 '메구미 사건' 등 일본인 납치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일본 내에서 대북 강경 여론이 부상, 

북일수교는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국내 여론의 견제 등으로 인한 장애물에 부닥치자 일본은 

북일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대북 강경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북한에 피랍된 일본인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 메구미 사건: 북한은 1977년부터 1985년 사이에 대남 공작을 위해 일본인 15명을 납치했다. 2004년 11월 북일수교를 위한 협상에서 일본이 귀국한 5명 외의 

10명에 대한 안부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은 10명 가운데 8명은 사망했고, 2명은 입국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3세 때 납치됐던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에 건넸는데,

유골이 메구미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일본 내 반북 여론이 일면서 2006년 2월을 마지막으로 북일 사이의 수교 협상은 중단되었다.

 

한편 북한의 전방위외교는 주변국을 넘어 유럽연합과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되었는데, 북한은 2000년 1월 이후 

유럽연합 국가들과의 국교수립을 추진하여 27개 회원국 중 25개국과 수교를 성사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외교관계도 복원하였는데, 원래 동남아시아는 냉전 시기 비동맹외교 차원에서 북한이 전략적으로 

중시했던 지역이었으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비동맹외교가 무의미해지면서 경제협력의 파트너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이에 북한은 1999년 1월 브루나이, 2000년 7월 필리핀과 수교하여 1983년 아웅산 테러로 국교가 단절된 미얀마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2000년 7월에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도 가입하였다. 

이후 북한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양자·다자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2007년에는 미얀마와 국교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전방위외교는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 그리고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장기간의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어 외교 전략의 변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등장하게 되는 6자외교, 신북방외교 등이 바로 그러한 대안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신윤재. (2020). "北에 끌려가 못 돌아온 13살 소녀..."아베가 책임져야", 매일경제, 7월 11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중앙일보. (1999). "김일성­가네마루회담 공동선언 전문", 중앙일보, 9월 29일.

 

출처:연합뉴스

 

1인 집권체제인 북한에게 있어 권력의 승계과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모두 알다시피 현재 북한은 3대째 세습 중이며, 이 과정 속에서 2번의 승계과정을 거쳤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김일성→김정일'로 '김정일→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정일 - 김정은 승계과정 비교

 

김정일과 김정은 후계구도 비교

 

차이점 (1):  '후계검증 기간'

김정일은 1973년 당 조직부와 선전부를 장악하고 1974년 정치국원에 임명됨으로써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 이후 6년간의 후계 검증 기간을 거쳐 1980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에 피선됨으로써 공식적 후계자임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었다.

 

반면, 김정은 21개월이라는 매우 짧은 후계검증 기간을 가졌다. 2009년 김정은의 생일날인 1월 8일, 김정일이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제1부부장에게 하달하며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며, 이후 21개월간 대외적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다가, 2010년 9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정과 당 중앙위원 그리고 인민군 대장 등 공식 지위에 선출되며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었다.

 

 

왜 이토록 기간 차이가 나는 것일까?

 

 

- 김정일의 권력승계

김정일이 6년이란 긴 후계기간을 가진 이유는 대내외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다.

김일성이 권력승계를 대외적으로 최초 언급한 시점은 1971년 6월 24일 개최된 「조선사회주의 로동청년동맹」 제6차 대회에서 연설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승계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8월종파사건'이 있은 이후, 소련과 동구권에서의 변화와 중국과 소련의 분쟁 등.. 혼란한 환경적 변화를 보며 권력승계문제를 염두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대내외적 긴장상태를 자신의 권력강화개인숭배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속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개인숭배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더불어 '갑산파사건'과 '김창봉·허봉학 사건'과 같은 2인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면서 '혈연관계에 의거한 선위 방식'의 권력승계 계기가 앞당겨졌다.

 

 

- 김정은의 권력승계

김정은의 승계과정은 김정일때와 달리 매우 압축적이며 빠르게 이루어졌는데,  빠른 승계과정을 거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평가된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고, 이와 같은 최고지도자의 급격한 건강악화는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승계과정의 속력을 높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내정한지 3년 만에 김정일이 사망한 사실로 보아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경제적 상황 악화도 후계체제구축에 속도를 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당시 북한은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악화 그리고 대(對) 중국 의존도의 심화 등 대내외적 불안 요인들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김정은으로 하여금 3대 후계체제의 구축 속도를 빠르게 진행하여 유일적 지도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차이점 (2): 권력승계과정의 단계

북한의 권력승계 단계는 '호칭 등장 - 공식활동 - 외교무대 등장 - 현지지도(실무지도) - 진한 글씨체로 이름 게재(노동신문 등) - 노작 발표 - 당·정·군 최고 직위승계'로 구분할 수 있다.

 

승계과정 중, 공식활동을 개시한 시점도 두 과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김정일의 경우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었고, 이후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사진이 실린 건 1980년대였다. 즉, 후계자 지명 후 6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얼굴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반면, 김정은은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공표되고 바로 당일 찍은 기념사진을 통해 노동신문 1면에서 모습이 공개되었다.

 

당·정·군 최고 직위승계과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생존해 있었던 때에 최고사령관직(군)을 물려받았지만, 나머지 직책의 이양은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한참 걸렸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이 3~4년의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였고, 당 총비서(당)에는 1997년 10월에, 국가기관 최고 직책으로 강화된 국방위원장에는 1998년 9월에야 취임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직후, 2011년 12월 최고사령관으로 추대,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의와 제12기 5차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당 제1비서, 당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 제1위원장 등 당·정·군의 모든 직위에 등극하며 초고속적이고 압축적인 권력승계를 이뤘다.

 

김정일의 경우, 20년 정도의 지도자 수업으로 리더십이 확고하고 고난의 행군으로 불릴 만큼 북한 경제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1998년 북한 경제의 추락세가 멈추고 4년 만에 비로소 김정일은 강성대국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권을 공식 출범시켰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의 공식 출범은 4개월 만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직 확고하지 않은 리더십으로 인한 체제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조기에 출범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김주수, 문은석, 윤희철. (2014). 김정일과 김정은의 권력승계과정 비교를 통한 남북관계 전망. 대한정치학회보, 22(2), 47-69.

송정호. (2005). 북한 권력승계문제의 쟁점과 전망: 사회주의 사례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7(3), 7-51.

서유석. (2013). 북한 권력승계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북한, 497(497): 94-100

권순철. (2012). "젊은 후계자는 북한을 어디로 이끌까", 주간경향, 1월 3일

백인주. (2015).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유코리아뉴스, 3월 16일

엄기영. (2010). "김정일 16년 걸렸는데… 김정은 ‘권력접수’ 3년내 끝낼듯", 국민일보, 9월 29일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13. pp.151~153

 

※ 해당 게시글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 4장 선군경제, 그리고 시장개혁에서 나온 개념을 참고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이다. 

 

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우리나라의 기반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와는 상당히 상반된 개념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는

이해가 명확하게 되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그래서,

오늘 포스팅에서는 북한의 사회주의경제체제의

근간이 되었던 계획경제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고,

현재 북한이 시장경제가 어느정도

개입된 계획 경제체제를 

수립하고 있는 이유까지

알아보려 한다. 

 

1. 기본적 경제개념


다음에 나올 다양한 개념들의 이해를 돕고자,

사회주의 계획 경제체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인 경제체제에 대한 

개념을 먼저 다루도록 하겠다. 

 

기본적으로 경제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의 원인은 바로

'자원에 대한 희소성'이다.

 

자원의 양보다 그 욕구가

더 강해지면

자원에 대한 희소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때 대표적으로 

세가지의 경제문제를 고찰하게 된다.

 

1)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는가? (생산물 결정 문제)

2)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생산 방식 결정 문제)

3)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 

또는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분배방식 결정 문제)

 

이러한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기준은 

효율성형평성이다. 

 

생산물을 결정하는 문제나,

생산방식을 결정하는 문제 같은 경우에는,

'최소비용, 최대이익'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효율성'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분배방식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효율성'과 더불어 '형평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는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공정성'도 상당히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율성과 형평성을 기준으로

생산물, 생산방식, 분배방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의된 제도나 방식을 

'경제체제'라고 한다.

 

경제체제는 두가지 기준에 따라 나뉘게 된다.

 

생산수단소유 형태에 따라

자본주의사회주의로 나뉘는데,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사유의 형태라면,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는

공유의 형태이다.

 

경제문제해결방식에 따라서는, 

전통경제체제, 계획경제체제, 시장경제체제

분류된다. 

 

전통경제체제는 

원주민 부족 사회와 같은 

단순한 사회를 그 예시로 생각하면 된다.

 

즉, 전통과 관습에 따라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체제이다. 

 

이 체제하에서는, 연장자나 

그 사회 내에서 정해온 관습에 의해

생산과 분배를 하게 된다. 

 

시장경제체제는 

시장 가격 기구에 의해,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시스템으로 

경제적인 유인이 매우 중시된다. 

 

유명한 경제 개념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가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격에 의해 

생산과 분배 방식, 요소들이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계획경제체제

정부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체제로 

대표적으로 중국과 북한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체제는 정부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에 유리하고,

똑같이 생산물을 나누는 방식이기 때문에, 

형평성을 증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경제활동 참여로 구성원들을 

이끌기에 어렵다는 단점이 발생하여, 

비효율성이 증대될 수 있다. 

 

지구 상의 모든 국가들은

온전한 계획 경제나 시장경제는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중국과 북한도 

시장경제적 요소가 있으며,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복지 시스템이라는 계획경제적 요소가

있는 혼합경제체제이다. 

 

2. 현존사회주의 


기본적인 경제 개념을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체제 내의 

계획 경제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 이론에 대해 

탐구해보도록 하겠다.

 

계획경제는 

아까 언급했듯이, 

가격신호를 통해 움직이는

시장경제와는 달리, 

중앙계획 당국이 

생산요소의 투입 비용과 자원배분의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서 

투자 및 생산을 결정한다. 

 

북한을 예로 들자면,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의

정치적인 계획 내에서 경제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경제 계획을 세운다 하며

제품군별로 몇 퍼센트를 증진시키겠다는

구체적인 발표를 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이 바로 북한이 투입요소와 비용, 

배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획경제적 방식인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체제 하의 

'현존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물량물동적 경제체제' 또는 '생산물 경제'를 

지향하는 계획-이데올로기 체제이다. 

 

여기서,

'물량물동적 경제체제' 또는 '생산물 경제'라고 

하는 것은, 

생산, 투자, 판매 등에 관한

경제활동 일체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이 

기업이 아니라 '국가'(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에

집중되고, 자원배분이 

'물량 표시'로 행해지는 체제이다. 

 

이 체제 하에서의 생산은 

거래를 위한 '상품'의 생산이 아닌, 

사용가치, 즉 소비를 하기 위한 요건을 

충족하려는 목적이다. 

 

따라서, 이런 소비 수요를 

통제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국가 소유 아래에 두는

정치적인 독재를 수립하여 

소비자선호를 계획자 선호로 대체한다. 

 

정리하자면, 

'물량물동적 경제체제' 또는 '생산물 경제'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처럼 경제활동에 대한 

의사권한이 개인이나 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있다.

 

그리고,

배분도 자본주의처럼 소비자의 선호를 따져

그 수요나 공급에 따라

가격이 조정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계획자가 의도한 대로 자원을 생산,배분하며, 

단순히 '물량'을 표시함으로써, 

경제 시스템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량물동경제체제는 

현물물자의 양을 기준으로 생산과 

분배되기 때문에, 

물자대차대조표(material balances)를

중심으로 전시공산주의의 경험을 

사회주의의 원형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 전시공산주의 ※

전시공산주의란, 

소련의 국내전·간섭전쟁 시기(1918~1921),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방위를 위해

취해진 일련의 경제정책이다. 

 

당시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

국내전 및 외국에 의한 간섭전에 의해

소련의 국토가 전장화되어, 

도시가 식량이나 주요 원료공급지와

단절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러시아 혁명으로 쟁취한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1918년 11월에 

노동국방회의(의장: 레닌)를 창설하여

교통,산업, 자원을 모두 통제하고

국민경제를 전시체제로 

긴급하게 편성했다. 

 

'모든 것을 전선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대공장은 물론 

중소공장까지 국유화시키고 

사적상업을 금지시키며, 

농산물도 '징발제'로 

전환하는 국민수탈이 시작되었다. 

 

전표에 의한 배급제도로 바뀌면서, 

화폐의 효용도 저하되어 

물건의 힘이 돈의 힘보다 

세진 시대가 되었다.

 

이 '전시공산주의'는 

사회주의체제를 뛰어넘어 

바로 이상세계인 공산주의로 갈 수 있는

최단 코스로 착각되어 

전쟁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이는 농민층의 불만과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불신이 증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경제가 힘들어지자, 농민, 공장노동자들이

반란을 시작하였고, 해군사병 마저 반란을 일으키며

'식량징발제'를 '식량세제'로 전환하여

신경제정책(NEP)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량물동적 현물경제체제는

철저한 국가소유와 시장폐지로 

일축할 수 있다. 

 

즉,

전시체제가 완전한 

공산주의의 모습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유의미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존 사회주의' 경제의 운용에 대해

전시체제 경험이

중요한 준거를 제시한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경제 운용은

가격에 따른 시스템의 움직임은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체제는 

경제 전반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관료적이고 물량적인 경제 조정 방법으로

작용되었다. 

 

즉, 

명령관계나

현물수량신호체계(quantity signals)에 

의한 거래와 교섭이 경제운영과 조정의 중심으로

등장한 체제인 것이다. 

 

 

3. 코르나이 「부족의 경제(Economics of Shortage)」


코르나이는 

사회주의 경제이론에 있어서는

'부족의 경제' 메커니즘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화폐가 발달하지 않은

체제가 지속될 때, 

어떻게 경제가 운영되고, 

그 과정에서 아랫단위와 윗단위가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상호 교류하고

거래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주의'체제가 결과적으로는

'부족의 경제'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히며 비판한다. 

 

코르나이의 이론의 대전제는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기업의 행동을 

거시적인 지표 혹은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다. 

 

이는 개별 경제 주체들이 

가격지표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관료주의적인 조정수단이나,

'노르마(norma)'라는

노동기준량에 따른 조정수단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가격의 변화에 따라

어떤 결과를 낸다는 것 자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에서의 문제 해결 수단은

기업의 행태가 가격에 의해 온전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료적인 정치체제가 개입된

반화폐상태라는 것에 주목하고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점 때문에,

'부족의 만성화'라는 

본질적 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이 체제 하에서 경제 조정 수단은

자본저량(stock)인데, 

이는 상품 구매를 위해 기다리는 줄 길이,

주문이나 명령, 대기시간 등으로 나타나는

현물 수량 신호들을 의미한다.

 

이런 조정수단들이

'부족'을 재생산하고 결국엔 

경기 침체로 몰아가는 경로는 두가지이다. 

 

(1) 현물수량신호체계에 의한 현물 수량 추동력

(2) 연성예산제약 이다.


(1) 현물수량신호체계에 의한 현물 수량 추동력

현물수량 추동력의 핵심은 

비용에 개의치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생산

추구하는 현상이다. 

 

톱니바퀴효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데,

이 톱니바퀴는 한쪽으로만 돌기 때문에

역진이 불가한 효과를 의미한다.

 

계획경제는 한번 계획을 세우면

다음해 계획 수립 시점에서는 

그것보다 낮은 실적을 목표로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년도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목표치를

제시할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꾸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미달상태가 지속되게 되고, 

결국엔 목표 자체를 

낮게 세우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계속 생산을 하게끔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더 더 많은 투입량을

요구하게 되고, 이 과정은 

지배인의 보상을 높이고, 

기업의 교섭력 또한 높이기 때문에

계속된다. 

 

 

(2) 연성예산제약(soft budget constraints)

 

연성예산제약이란, 

기업이나 정부가 수입을 신경쓰지 않고, 

지출하거나 예산을 집행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기업의 적자를 정부가 메워주는 

구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자본주의 기업에 적용되는 

'경성예산제약'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경성예산제약'은 

연성예산제약과 반대로, 

대부분의 경제행위가 소득과 수입의 제약 내에서

이루어지고, 이 제약을 넘어서게 되면 부채를 

지게 되며, 이 부채를 상환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즉, 엄격한 예산 제약 하에서

경제주체가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연성예산제약은 

예산 제약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생산요소 및 제품 가격 변화에서

자유로워, 과도한 투자성향으로 번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존을 위해 기업활동을 열심히 하려는

동기가 줄어들고, 어차피 

적자도 중앙정부에서 메꿔주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어도 그 명맥을 이어가는

이른바 '좀비기업'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종국에는, 이러한 기업들이

국가재정상태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국가경제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4. 사회주의 국가들이 상품-화폐 경제를 병행하게 되는 이유


이제까지 알아본 

'현존사회주의' 의 탈화폐적 특성은 

수직적인 명령-통제의 특성과

비가격 신호 방식에 익숙한

경제 구성원들 간에 벌어지는 

수평적인 정보 교환 양상까지 포함한다.

 

이는, 수동성, 저생산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상품-화폐의 병행을 해야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체제에서도 

상품이 시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시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상품-화폐 경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논리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용인되어, 물량물동경제를 운용하는데

사용하는 수단으로만 쓰기도 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를 조장하여,

경제 문제를 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작용되기도 한다. 

 

'현존 사회주의'내에서 

상품-시장의 관계를 허용하는 것은 

중요한 경제운용원리의 부분적 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 사회주의' 경제들이

대체적으로 

'루블에 의한 통제(control by the rouble)'와 같은

이론적인 전제 자체에서

가격과 화폐 지표에 의해

움직이는 재무체제를 추구한다.

 

북한 또한, 

'원에 의한 통제(control by the won)'를 

표방하며, 화폐, 금액 지표에 의한

통제를 항상 강조해왔다. 

 

이는 위에서 내내 설명한

'물량물동적 경제체제' 내에서 

필요에 따라 과도기적인 

경제운영의 원리로서 

가격시스템을 국가차원에서

활용한 결과이다. 

 

국가 통제밖에서 

국가의 묵인 아래 이루어지는

제2경제체제나, 소비재 시장은

단지 경제의 하부에서 발생하고 

기능하는 체제로 인식해서 

계획체제와는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 체제는 

그간 물량물동적 경제체제와 

이를 보정하거나 대립하는 시장의 범주가

상호 밀고당기기를 지속해왔다. 

 

1980년대 후반기에 와서는,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시장이 계획을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어

대규모 체제 전환이 시작되었다.

 

북한 체제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했고

이것이 소위 '선군경제론'의 배경이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재 북한이 고수하고 있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는 

생산 결정 권한이 국가에 있고, 

배분이 물량으로 표시되는 

물량물동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물량물동경제체제는 

가격이 개입이 되지 않고, 

'현물의 수량'을 기준으로 

수요와 공급을 파악하는데, 

이 체제 하에서는 

기업의 경쟁력과 생존동기마저

저하시키기 때문에, 

결국에는 국가를 약화시키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상품-화폐 경제의 병행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소위 계획경제 내에서의 

과도기적 요소로 포장하였다. 

 

결국엔

이러한 것들이 1980년대에 

대규모 체제전환이 시작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흐름에서도 사회주의적 이념형의 

경제체제를 고수하여 

'선군경제론' ,'핵무력-경제건설 노선'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문헌]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13. pp.155-160.

https://m.blog.naver.com/14t_cs/221511996714 (검색일: 2021.02.14.)

https://m.blog.naver.com/14t_cs/221513158092 (검색일: 2021.02.14.)

https://blog.naver.com/automia/221466875629 (검색일: 2021.02.14.)

전시공산주의”,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9621&cid=40942&categoryId=31811 (검색일: 2021.02.14.)

 

 

 

 

 

2018년 6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과 시진핑의 모습. 출처: 연합뉴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북한은 당-국가체제로, 조선노동당이 모든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독재체제의 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내에서의 외교는 일당 독재라는 특징과 함께 각국의 공산당이 공통의 목적을 지닌다는

것에서 기인하며, 이를 기반으로 당 외교(당 대 당)와 국가 외교(정부 대 정부)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참고로 소련 해체 이후 지금은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각국 공산당의 공통 목표라 함은 바로 

세계혁명으로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proletarian internationalism)'가 될 수 있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각국의 공산당은 세계혁명운동에의 기여 차원에서의

국제적 임무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부여되었는데, 

이를 주창한 소련의 레닌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일국의 혁명운동을 세계적 규모의

혁명운동의 이익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족주의와 자국 이기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세계혁명의 관점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레닌은 '코민테른'으로 불리는 국제공산당을 조직하고

각국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일괄적으로 지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산주의의 대부였던 소련의 국가 이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스탈린의 소련 지배주의로 변질되었다.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모습. 출처: 위키백과

 

북한의 주체사상의 근간이 되는 '자주외교'는 바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국가이익 간 충돌에 대처하기 위해 개발된 논리이다.

북한은 냉전시기 자율성(자주성)에 기초하되 소련을 중심으로 형제적 단결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제질서로 보았으며, 이를 지켜야 할 외교원칙으로 고수하였다.

 

북한 외교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대 사회주의 국가 및  비 사회주의 국가와의 외교 행태의 구분이

가장 중요하다.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이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은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당 대 당 외교 차원으로 접근한다.

 

아래에서는 북한 외교의 이원적 특성(당 외교, 정부 외교)을 바탕으로 북한 외교정책의 집행 및 결정 체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 외교정책의 집행체계

 

북한의 외교는 상술하였듯이 크게 사회주의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당 외교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국가 외교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참고로 남북관계의 경우 국가 관계가 아닌 민족 내부 관계로 간주되어 

대남정책을 담당하는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부가 관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대북정책을 외교부가 아닌 통일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지난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에 임명된 김영철의 모습

 

1) 당 외교

 

북한에서 당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는 조선노동당의 국제부이다. 

당 국제부는 이른바 '형제당'으로 불리는 외국 공산당들이나 북한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외국 정당들과의 교류협력을 담당하는 부서이며, 상술하였듯이 북한의 당 외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유산으로서 사회주의 외교의 고유한 특징이다.

 

지난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 국제부장(정치국 후보위원 겸)에 임명된 김성남의 모습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공산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국제노동계급이 서로 지지성원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사상과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세계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각국의 공산당들이 "서로 지지성원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과정이 바로 당 외교인 것이다.

 

현재 북한의 당 외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이다. 

현실에서 북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밖에 없으며, 북한과 중국 간의 외교는 국가 외교의 성격도 갖고 있지만 

그 핵심은 당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당 대회에서 조선노동당 국제부장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통역사 출신인 중국통 김성남이

중국 유학파 출신으로는 최초로 임명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은의 방중 소식을 알리는 <<노동신문>>의 1면 모습

 

2) 국가 외교

 

북한에서 국가 외교를 관장하는 곳은 내각 산하의 외무성으로 다른 나라의 외교부/외무부의 기능과 역할에 있어 별다른 차이가 없다.

2020년 6월 기준 북한은 161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고(우리나라는 191개국),

48개의 상주대사관, 3개의 영사관, 3개의 무역대표부 형식으로 54개의 재외공관을 운영하고 있다(출처: 외교부 재외공관 설치현황)

 

이에 맞춰 외무성 역시 아시아 1국, 아시아 2국, 유럽 1국, 유럽 2국, 북아메리카국, 아프리카/아랍/라틴아메리카국의 

지역 담당 부서와 보도국, 영사국, 조약법규국, 의례국, 국제기구국, 경제협조국 등 12국으로 조직이 구성되어 있다.

 

지난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내각 산하 외무상에 임명된 리선권(정치국 위원 겸)의 모습

 

그런데 북한의 외무성은 형식적으로는 내각 산하이지만 내각 총리의 지시는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북한 내각은 경제문제만을 관리하는 곳으로, 비경제부서인 국방성,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이 

내각이 아닌 국무위원회 산하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 내각의 구성에서 외무성을 제외하면 모두 경제기구인 것으로 볼 때, 

외무성은 형식적으로는 내각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최고지도자의 지시를 받는 국무위원회의 직할 기구라는 평가가 적절할 것이다.

 

한편 지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리선권 외무상을 권력 실세인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보선한 것은 현재 북한이 

코로나 19, 경제난 등으로 인해 어려워진 국면을 외무성을 활용한 국가 외교에 무게를 실으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북한 정부 조직(내각)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1/14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권력 기구> 1. 정부 조직

 

<북한의 권력 기구> 1. 정부 조직

대한민국, 미국 등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에서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각각 독립된 기관으로서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을 통해 국가 권력의 집중 및 남용을 방지하는 반면,

thenorthkoreaherald.tistory.com

 

2. 북한 외교정책의 결정체계

 

북한의 헌법에 의하면 외교정책은 국가를 대표하는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수립하게 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6장 제4절 제104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가진다.

(중략)
5.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대표를 임명 또는 소환한다.
6. 다른 나라와 맺은 중요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한다.
7. 특사권을 행사한다.
(하략)

 

그러나 헌법상 이러한 조항이 없어도 북한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비단

외교정책뿐만이 아니더라도 국가 전반의 모든 사업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면서 선대 김정일 대에서는 소홀했던 당을 활용한 집체적 의사결정 시스템, 이를테면 

당 대회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정치국회의 등을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2월 11일 진행되었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모습. 출처: 연합뉴스

 

김정일은 형식적이나마 존재했던 정책 결정에 있어서의 공식 체계를 무시한 채 일부 소수 측근의 조언을 받아 

독단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정은 시기에 들어오면서 2010년 당 대표자회를 시작으로 

두 차례의 당 대회 및 여러 차례의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정치국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외교정책에 있어서의 방향 및 최종 결정은 수령(김정은) 1인에 달려 있지만,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공식적 체계는 상당 부분 복구되었으며,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국가정보원. (2019). 「북한법령집. 상」. 

박재우, 이설. (2021). "北 리선권 외무상·'중국통' 김성남 승진…북미·북중관계 '포석'", 뉴스1, 2월 11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김정일과 주체사상

Ⅲ. 하위 담론: 붉은기 철학

Ⅳ. 맺음말

 


 

주체사상은 북한의 전 영역에서 영향력을 파급시키며,

모든 수준의 지도지침으로 제시된 사상이다

그 기원은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두고 있으며,

김일성은 전후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주노선으로 주체사상을 등장시켰다

 

 

김일성이 등장시킨 주체는 김정일에 의해 발전됐는데,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알기 위해서

1982년에 발표된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북한에서

탁월한 주체사상 이론가로 평가됐다

 

주체사상의 기원과 변천과정 :: https://thenorthkoreaherald.tistory.com/52

 

1970년대를 거치며 체계적인 사상체계의 틀을 갖춘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자성을 더해

북한 유일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공고화된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정일이 제시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론과 강성대국론,

김정은의 ‘김일성ㆍ김정일주의’와 ‘김정일애국주의’를

차례로 살펴볼 예정이다

 


 

Ⅱ. 김정일과 주체사상

 

1982년 3월 31일 김일성 탄생 70주년 기념

전국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을 통해 주체사상에 대한

종합적 체계화를 시도했으며,

철학원리의 도입을 넘어

주체사상의 전면적 심화단계를 보여주려 했다

 

김정일은 논문에서 “주체사상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주체사상은 크게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원리, 지도적 원칙

3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원리란 사람중시의 철학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본성과 지위 및 역할을 규정한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하며

사람에 대한 철학적 견해를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김정일은 사회역사원리를 설명하며

“주체철학은 처음으로

자주성과 창조성이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이룬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인간에 대한 완벽한 해명을 주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주체를 인민대중으로 상정하는 것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높이는 주체로 규정한다

 

이는 자발적인 인민동원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며,

동시에 동원되는 대중은

당의 지도, 즉 수령의 영도를 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리적으로 지도적 원칙이 필요한 셈이다

 

마지막, 지도적 원칙을 통해

수령과 당의 영도 하에 인민대중의 자발적 동원이라는

방법론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상개조선행정치사업선행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사상개조를 위해 주체의 혁명관을 학습하고

조직생활과 실천생활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 중심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에 맞추었다

 

김정일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은

당과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심각하고 복잡한 혁명투쟁을

힘 있게 벌려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이룩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환치시켜버린 레닌주의와

당 독재를 수령 독재로 바꿔버린 스탈린주의의 논리에

‘사람’과 ‘인민대중’에 대한 예찬을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수령 독재를 정당화한다면,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후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관한 많은 저작을 발표했고,

북한의 매체는 김일성이 창시하고 발전시킨

주체사상을 김정일이 심화ㆍ발전시켰다고 선전했다

 

그러던 중 1985년 10권의 주체사상 총서가 발간됐다

제1권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에서는

“주체사상이 원래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김정일)의

혁명사상의 진수를 이루는 사상만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혁명사상 전반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이 같은 언급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의 사상’과

동일시하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으로 간주하게 되는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2권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위업, 수령의 혁명위업 계승에서

차지하는 수령의 후계자의 절대적 지위의 특징은

수령의 후계자가 수령의 사상과 위업을

완성하기 위한 사상, 이론, 전략전술을 제시하고,

그 실현에로 인민대중을 조직 동원하는 최고뇌수,

최고의 영도자이며 당과 인민대중을

수령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우는

단결의 중심이라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수령의 후계자도 수령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지위’를 누리는 것

주체사상이 보장하고 있으므로,

주체사상은 수령과 후계자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85년에 발간된 이 총서는

그간 행해진 주체사상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한 것이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여러 이론서들이 발간됐지만,

1980년대 중반에 새롭게 총서를 발간한 것은

주체사상에 대한 김정일의 저작을 포함해

주체사상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으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Ⅲ. 붉은기 철학

 

실천이데올로기로 출발했던 주체사상이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된 시점에

북한은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폐쇄적 자립노선, 수령의 과도한 유일체계,

비효율적 계획경제 등이 초래한 북한경제의 위기는

급기야 사회주의권 붕괴와 수령 사망이라는

당시 상황과 맞물리면서

1990년대에 북한체제 자체의 위기로 발전했다

 

새롭게 도래한 위기상황은 주민들에게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승리가 아니라

체제위기 극복을 정당화할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이에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된 주체사상 대신

다른 담론의 제시를 통해 ‘정당화’와 ‘동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대신했다

대표적으로 수령 사망 이후 위기의 심화 속에서 등장한

‘붉은기 철학’을 들 수 있다

 

‘붉은기’는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기에

불렸던 적기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항일 빨치산의 정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붉은기 철학은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에게 혁명동지들이 보여준

‘자력갱생ㆍ간고분투 정신’, ‘수령 결사옹위 정신’,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북한 주민들에게 ‘붉은기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당면한 어려운 상황을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인고의 정신 등으로 무장해

극복하도록 유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체제동요를 우려해 주민들에게

체제고수 신념을 고취시키는데 활용했다

 

특히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붉은기 기치 - 붉은기 철학 - 붉은기 사상’ 등으로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주장했다

 

북한은 붉은기 철학을 신념과 의리의 철학이자

수령결사옹위를 강조하는

일심단결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위기상황에서 버팀과 인내의

집단적 의지를 제공하는 정치담론이자

배신자ㆍ변절자에 대한 정치적 경고의 의미도 가진다

 


Ⅳ. 맺음말

 

북한을 이야기할 때 주체사상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체사상이 대내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체사상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대남 정책에 크게 이용되는 동시에

제3세계에서 북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상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주체사상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의 유일 사상체계로,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위준칙을 정해주는 도덕규범이기도 하다

 

이에 김정일은 여러 저작을 발표해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기존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창시와 해석권이

김일성에 의해 주도돼 왔으나,

1982년 발표된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계기로

김일성 1인 독점에서 벗어나 김정일로 이양됐다

 

이후 주체사상의 중요한 논문 대부분은

김정일에 의해 발표됐다

김정일의 주도 하에 주체사상의 유일성이 강조됨으로써

체제유지기능을 넘어서

김일성ㆍ김정일의 세습체제구축을 위한 역할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은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2014),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65-92.

도현자. “주체사상의 변화와 북한의 대외 정책”,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이용호. “북한 주체사상의 통치기능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9-26.

장명봉. “마르크스 레닌주의 포기하고 ‘주체사상’ 강화: 북한 신헌법의 내용평가”, 『통일한국』 제109권(1993), 평화문제연구소, pp.65-69.

장의관. “북한의 통치이념과 주체사상”, 2010, 현대사회연구소, pp.6-11.

정용길, “북한의 사상체계: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관계”, 『북한학연구』 제20권(1991),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pp.29-44.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북한의 붉은기사상’ (접속일: 2021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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