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놓쳐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 짧은 글을 작성해고자 한다.

 

'북한 정권'이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평시(平時)와 유사시(有事時)로 나눠 생각해본다면

그건 아마도 정보유입미군의 전략자산이라 생각된다.

 

 

1. 정보유입

이유: 통치 정당성을 부여하는 세계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형의 위협

 

평시에 북한정권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정보유입이다.

모든 정권이 그러하듯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독재정권에서는 특히나 더 중요하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세계관을 구축했고 정보를 통제하며, 수령과 공산당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정당화시켜왔다.

그리고 언론(선전매체)은 세계관 형성에 구체적 수단으로써 사용된다.

 

세계관은 국민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극도의 정보 통제 속에서 한 개인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이 극도의 폐쇄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관이 외부 유입정보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세계관의 혼란은 곧 북한주민들에게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부추길 수 있다.

나아가 자칫 주민들 사이의 공감대 형성(공통지식)으로 이어진다면 체제에 대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동독이 무너진 근본적인 이유가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정권이 계속해서 미국을 침략의 대상으로 규정(=세계관)짓고 대내외 선전매체(=제한된 정보)를 통해 위기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유도 이를 활용한 일종의 통치전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외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경제고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을 회피함과 더불어 체제 결속을 위한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미군의 전략자산

이유: 북한 수뇌부를 타격할 수 있는 물리적 위협

 

유사시에 북한정권이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은 미군의 전략자산일 것이다.

미군의 전략자산은 실질적으로 북한의 수뇌부에 대한 정밀타격이 가능하며, 지하 깊숙한 벙커까지 타격할 수 있다.

또한 미군은 그 어느 국가보다 실작전 능력이 뛰어나다. 

 

북한 지휘부 타격에 거론되는 전략자산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B61-12 전술핵을 탑재한 F-35A

W76-2 저위력 탄두 장착 Trident-II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저위력 탄두 장착 토마호크(Tomahawk) 순항미사일(SLCM)등이 있다.  (토마호크는 2022 NPR 하 폐기되었다.)

①F-35A & B61-12 ②Trident-II SLBM ③Tomahawk SLCM <출처: 조선일보, SBS>

 

KIDA, [바이든 행정부의 핵태세검토보고서(NPR)와 저위력 핵무기 동향] 발췌. 2022-04-05.

 

북한의 지속적인 핵개발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물리적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측면에서 핵무기 고도화와 미사일 발사 능력을 지속해서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억제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북한의 최종 목표는 '핵 군축회담'일 가능성이 높다. 핵보유 국가로서 미국과 동등한 지위로 군축협상을 벌이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재해제 등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얻어내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즉, 북한에게 있어서 핵무기는 '정권 생존을 스스로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자 자신들의 '미래 비젼을 실현케할 전략적 수단'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은과 김여정의 모습. 출처: 일요신문

 

 

 

김일성 가계의 혈통을 '백두혈통'이라 지칭하며, 그 일가를 신성시하는 북한에서는 오직 그 혈통을 잇는 

'수령' 한 사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며, 사실상 혈통 밖의 2인자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든 구조이다. 

현재 북한에서 김정은의 뒤를 이어 '암묵적'인 2인자 행세를 하는 인물이 바로 그의 유일하 여동생인 '김여정'이라는 것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김여정의 공식 직위나 직함은 당 서열상으로는 2인자가 아니지만, 그가 김정은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점과 
김정은을 수행하는 활동, 그리고 대외에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볼 때 명실상부한 2인자인 것이 확실하다.

 

이에 본 포스팅에서는 대남 및 대미 외교에서 김정은의 '' 역할을 담당하며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는

역대 김여정의 대외 공개 담화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김여정에 관한 보다 자세한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

2021.01.04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정치] 김여정

 

[북한의 정치] 김여정

:: CONTENTS :: 1. 김여정 2. 과거 행보 3. 2020년의 모습 4. 2021년의 모습 5. 향후 기대 【 김여정 】 1988년 9월 1일 생이다 김정은의 친동생이며,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이다 1990년대 후..

thenorthkoreaherald.tistory.com

 

김여정의 지난 3월 담화에 대한 보다 자세한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

2021.04.10 - [북한의 동태] - [2021년 4월] 김여정의 대남 비난 담화

 

[2021년 4월] 김여정의 대남 비난 담화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대남담화의 문제점 Ⅲ. 전망(예측) Ⅳ. 맺음말 КНДР의 개인적인 견해가 담겨 있습니다 2021년 3월 16일과 3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노동당 김여정 부부장이 대남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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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시' - 2020.3.3 / 1,053자(대남)

 

김여정의 첫 대외 담화이자 첫 대남 담화로 <<조선중앙통신>>에서 보도되었다. 

담화 발표 전날인 3월 2일 김정은이 원산 인근에서 초대형 방사포 등 화력타격 훈련을 지도한 것을 두고 

통일부가 이에 대해 유감 표명을 하자 당일 밤에 발표한 담화이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문구를 사용함과 동시에 우리 당국을 비난하는 어조로 작성되었다. 

이를테면 북한의 행태를 두고는 '위협하고자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든가 '자위적행동'이라며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에 대해서는 '주제넘는 실없는 처사', '적반하장의 극치', '청와대의 행태는 세 살 난 어린이와 다르지 않아' 등

비난하는 문구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담화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김정은이 지도한 군사 훈련에 대해 정당성을 내세움과 동시에 최고지도자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미국대통령이 보내온 친서는 조미 두 수뇌분들사이의 특별한 개인적친분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 2020.3.22 / 1,136자(대미)

 

김여정의 두 번째 대외 담화이자 첫 대미 담화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에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 협조 관련 친서를 

보낸 것과 더불어 이에 대한 평가적 요소를 담은 담화로 <<조선중앙통신>>에서 보도되었다.

 

약 3주 전에 발표된 대남 담화에 비해 훨씬 절제된 외교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김정은과 트럼프의 관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관계'를 4차례 언급하고
'훌륭했던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판단이고 옳은 행동',
'두 수뇌분들' 등의 문구를 사용하였다. 

또한 트럼프가 김정은을 두고'자기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는 국무위원장 동지의 노력에 감동'한다든가,

아예 트럼프를 직접 겨냥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충심으로 사의를 표한다'라는 등 정중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김정은과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는 것과 더해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등과 같은 

행동을 기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③ '스스로 화를 청하지 말라' - 2020.6.4 / 1,170자(대남)

 

대한민국의 탈북민 단체가 태영호, 지성호 등의 국회의원 당선 소식을 알리는 대북전단을 살포한 뒤 

이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수행된 대남 담화로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되었다.

 

특히 체제에 위협이 되는 탈북민에 대해서는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 '들짐승보다 못한 인간추출물', 

'비열한 방식으로 <<핵문제>>를 걸고들면서'라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 문구를 사용하여 지칭하였다.

또한 우리 당국에 대해서는 '방치된다면 남조선당국은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

‘제 집안 오물들을 똑바로 청소해야’, ‘쓰레기들의 광대놀음을 저지시킬 법이라도 만들고’ 등의 문구를 사용하여

지속되는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한 행동을 촉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시 '개성공업지구 완전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
에 더하지 않은 북남공동련락사무소 폐쇄가 될지'라는 식의 협박성 어조를 담은 

문구를 내세웠다. 그러나 비난의 대상을 주로 탈북민에 국한하고 있으며 우리 정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김여정의 발표 담화 4시간 후 우리 정부는 대북전단 살포 금지와 관련한 법률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하였다.

북한이 대북전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전단 내용이 그들의 '최고존엄'을 모독하는 것이 주라는 것과 더불어

정보 유입으로 인한 사상 이반 현상을 경계하기 때문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여정제1부부장 담화' - 2020.6.13 / 720자(대남)

 

직전 담화가 발표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발표된 대남 담화로 전날 있었던 통일전선부장 장금철의 담화에 이은 

공세적인 담화라고 할 수 있으며, 통상 대외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에 발표되는 것과 다르게 처음으로 

대내 매체인 <<노동신문>>에도 함께 발표가 되었다

6월 11일 대한민국의 NSC 회의에서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및 물품 살포 행위 대응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 표명과 

관련하여 나온 경고성 담화이다.

 

해당 담화에서는 향후 어떠한 계획을 하고, 실제적인 행동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이 주요 논지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이제는 련속적인 행동으로 보복해야 한다', '확실하게 남조선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

'우리는 곧 다음단계의 행동을 취할것',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공동련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 '다음번 대적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

등의 문구를 사용하여 강경한 대응을 취할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실제로 담화가 발표된 후 3일 뒤에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도발을 감행하였다.

 

한편 김정은을 ‘조국의 상징이시고 위대한 존엄의 대표자이신 위원장동지'라고 지칭하고 있다.

또한 해당 담화에서 '위원장동지와 당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권한을 행사하여 대적사업련관부서들에

다음단계행동을 결행할 것을 지시',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라는 표현 등으로 보아

여정에게 대남 사업에 대한 전권이 확실히 주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⑤ '철면피한 감언리설을 듣자니 역스럽다' - 2020.6.17 / 3,827자(대남)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반응 격으로 나온 대남 담화로 

직전 담화가 발표된 지 4일 만에 나왔으며, 여태까지의 담화문 분량보다 훨씬 많은 분량으로 작성되었다.

<<조선중앙통신>>에서 보도되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반박하는 것이니만큼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비난하는 문구가 많이 사용되었다.

 

'철면피하고 뻔뻔스러운 내용만 구구하게', '특유의 어법과 화법

으로 <<멋쟁이>> 시늉을 해보느라',  '상전의 눈치나 보며 국제사회에 구걸질 하러 다닌 것이 전부',
'
미련한 주문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연설 때마다 꼭꼭 제정신 없이 외워대고 있는 것을 보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정신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항상 연단이나 촬영기, 마이
크 앞에만 나서면 온갖 잘난 척, 정의로운 척, 원칙적인 척 하며 평화의 사도처럼 처신머리

역겹게 하고 돌아가니 그 꼴불견 혼자 보기 아까워' 등 원색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에 우리 정부 또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의 대북 경고 메시지를 던지며 

'김여정 담화 무례하고 몰상식, 감내하지 않겠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김정은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성시하는 것 가운데서도 제일 중심핵인 최고존엄, 우리 위원장동지'라고 

표현하며 김정은에 대한 충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상전이 강박하는 <<한미실무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물고 사사건건 북남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 바쳐온'

등의 문구 사용을 미루어 보아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북미협상이 더뎌지며 

코로나 봉쇄 등으로 인한 어려운 상황의 해결에 우리 정부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여정제1부부장 담화' - 2020.7.10 / 3,445자(대미)

 

김여정의 첫 대미 담화가 발표된 후 약 4개월 만에 발표된 대미 담화로 직전 대남 담화와 마찬가지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담화문을 <<조선중앙통신>>에 발표하였다. 

6월 23일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발간,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 후 미국을 겨냥한 담화로 

해당 담화에서 북한은 한국을 통해 미국과 대화하거나, 한국과 함께 대화하는 것보다 미국과의 단독 대화를 

선호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담화에서는 북한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가운데 김정은과 트럼프 간의 친분, 신뢰 관계에 대해 

표현한 문구가 지난 대미 담화에 이어 재차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트럼프 현 미국대통령에 대한 우리 위원장동지의 개인적감정은 의심할바없이 굳건하고 훌륭하지만',

'위원장동지는 트럼프대통령의 사업에서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원한다는'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면서

둘 간의 관계는 의심할 나위 없이 두텁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입장은 '명백한 것은 조미수뇌회담이 미국측에나 필요한 것이지',

'우리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거두어들일 그 어떤 성과도 없으며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다'라고 하며 

'<<비핵화조치 대 제재해제>>라는 지난 기간 조미협상의 기본주제가
이제는 <<적대시철회 대 조미협상재개>>의 틀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김여정 자신은 '나는 원래 남조선을 향해서라면 몰라도 미국사람들을 향해서는 이런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라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음을 내보이고 있다. 

 

담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북미 간 협상은 미국한테나 급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북한이 더욱 원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조선외교부 장관 강경화의 망언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 2020.12.9 / 161자(대남)

 

직전 대외 공개 담화 발표 후 5개월 만에 발표한 담화이자, 김여정이 2020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대남 담화이다.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되었으며, 강경화 당시 외교부장관이 

12월 5일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아 발표한 담화이다. 

당시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북한이 더 북한다워졌다며', '자국 내 확진 0명이 이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었다. 

 

비교적 큰 사안이 아니었다는 판단 하에 여태까지의 담화문 중 가장 짧게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난조의 표현은 있으나 수위가 낮아지고, 대응에 대한 표현이 모호한 걸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 당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려는 모습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코로나 비상 방역이나 상황 등이 북한 내부에서도 녹록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⑧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 2021.1.12 / 527자(대남)

 

8차 당대회의 종료일인 12일에 발표된 대남 담화이자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된 2021년 첫 공개 담화이다. 

합동참모본부가 11일 정례 브리핑에서 '어제(10일) 심야시간대에 김일성광장에서 당대회 관련

열병식 행사를 포착'하였으며, '연습인지 본 행사인지 정밀 추적중'이라고 발표한 것에 대한 

비난 반응의 담화이다. 

 

자신들의 행사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의 집 경축행사에 대해... 적대적경각심을 표출하는 것은 유독 남조선밖에 없을것이다', '동족에 대한 적의적시각'

등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면서 '특등머저리들'과 같은 원색적 표현을 사용하여 비난하고 있다.

 

한편 김여정은 당대회 기간 동안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배제되는 등 당내에서 '직책상 강등'을 당하였지만 

당대회가 종료되자마자 대외 담화를 발표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⑨ '3년 전의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것이다' - 2021.3.16 / 1,801자(대남)

 

2021년 3월 상반기 한미연합훈련 진행에 따른 대남 비난 담화로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되었다.

 

해당 담화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한미연합훈련 자체의 취소이지 규모나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을

다음과 같은 문구를 통해 재차 강조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족을 겨냥한 합동군사연습자체를 반대하였지 연습의 규모나 형식에 대하여 론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또한 한미연합훈련에 따른 대응으로 '대남대회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정리하는 문제',
'금강산국제관광국을 비롯한 관련기구들도 없애버리는 문제',
'북남군사분야합의서도 씨원스럽게 파기해버리는 특단의 태책까지 예견'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강경책을 내세웠다.

 

실제로 북한은 해당 담화 발표 후 3월 21일 서해상으로 순항미사일 2발 발사, 3월 25일 동해상으로 신형전술유도탄 2발을 발사하는 등 연속적인 도발을

감행하였고, 25일 도발 이후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탄도미사일 발사라는 유엔 결의 위반 행위에 대한 첫 

대북 비난 메시지를 내기도 하였다.

 

한편 담화에서는
'
이 기회에 우리는 대양건너에서 우리 땅에 화약내를 풍기고싶어 몸살을 앓고있는 미국의 새 행정부에도 한마디 충고한다.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싶은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없이 잠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것이 좋을것이다'라며 

미국의 바이든 새 행정부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을 하였다.

 

 

⑩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김여정부부장 담화발표' - 2021.3.30 / 895자(대남)

 

직전 대남 담화가 나온지 2주만에 나온 대남 담화로, 3월 26일 서해수호의 날 기념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식 연설을 반박, 비난하기 위한 담화이다. 

 

당시 기념식에서의 문재인 대통령 연설에서 북한에 대한 언급은 전날 있었던 북한의 신형전술유도탄 발사를 우려한 

한 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담화를 발표하는 등 과잉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난 2020년 7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여 한 연설을 인용하면서 

'저들이 한것은 조선반도평화와 대화를 위한것이고 우리가 한것은 남녘동포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대화분위기에 어려움을 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니 그 철면피함에 경악을 금할수 없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미국산 앵무새'로 칭하는 등 원색적인 비난을 함과 동시에 ‘이처럼 비론리적이고 후안무치한 행태는….미국의
강도적인 주장을 덜함도 더함도 없이 신통하게 빼닮은 꼴이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미국을 언급하며 비난하고 있다.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자신들의 미사일 개발, 훈련 등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차원으로 파악된다.

한편 해당 담화에서는 처음으로 김여정이 맡고 있는 전문부서 '선전선동부'를 명기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⑪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 2021.5.2 / 305자(대남)

 

탈북민 인권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 4월 30일에 '25~29일간' 대북전단 50만 장, 

소책자 500권, 1달러 지폐 5,000장 등을 경기 및 강원 일대에 살포했다고 주장한 뒤 나온 대남 담화로 

<<조선중앙통신>> 뿐만 아니라 <<노동신문>>에도 보도되었다.

 

'탈북자 쓰레기들이 또다시 기어다니며', '매우 불결한 행위에 불쾌감을 감출수 없다' 등의 강경한 

표현을 사용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탈북민을 비난하는 담화를 대내 매체인 <<노동신문>>에도 보도한 것은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탈북민 및 탈북 행위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편 오전에 담화가 발표된 이후 김창룡 경찰청장은 서울지방경찰청 안보수사대에 신속한 수사 및 처리를 지시하였다.

 

 

⑫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 2021.6.22 / 140자(대미)

 

2020년 7월 대미 담화 후 약 1년 만에 발표한 대미 담화로 분량도 매우 짧게 발표되었다. 

2021년 6월 17일 중앙위원회 8기 3차 전원회에서 김정은의 ‘대화에도 대결에도 준비가 다 돼있어야 한다’는 발언 후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20일 언급('흥미로운 신호로 본다')에 대한 반박 담화이다. 

 

'조선속담에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은 아마도 스스로를 위안하는쪽으로 해몽을 하고있는 것 같다' 등과 같은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제이크 설리번과 성 김 대북특별대표의 발언('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자')에 반박하여 

협상 시도의 공을 다시 미국에게 넘기는 모습으로 보인다. 

또한 협상을 위해 미국이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져오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⑬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 2021.8.1 / 541자(대남)

 

7월 27일 휴전협정일을 기점으로 남북 연락채널이 복원된 것과 관련한 대남 담화이다.

여태까지 김여정의 대남 담화 중 가장 비난의 내용이 적으며, 8월 하반기에 진행 예정인 

한미연합훈련과 관련하여 북한의 입장에 맞는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담화이다.

 

'지금과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에 진행되는 군사연습…나는 분명 신뢰회복의 걸음을 다시 떼기 바라는 북남수뇌들의 의지를
심히 훼손시키고 북남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것이라고 본다'라는 문구를 사용하며

남북 연락채널 복원이 '중요한 반전의 시기'로 인정하면서 향후 남북관계의 최대 변수를 한미연합훈련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미에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은 우리가 하지 않는다'라며 

한미연합훈련 재개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우리 당국으로 넘기려는 모습을 보여 향후 군사 도발 등의 행태에 대해 

스스로 정당화를 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⑭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담화' - 2021.8.11 / 940자(대남)

 

한미연합훈련이 진행되는 것에 따른 대남 비난 담화이자 최근까지의 김여정 담화 중 가장 마지막 공개 담화로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에 보도되었다. 

 

해당 담화에서는 직전 담화에서 한미연합훈련 재개에 따른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문구를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조성된 정세는 우리가 국가방위력을 줄기차게 키워온것이 천만번 정당하였다는것을 다시금 립증해주고있다'라며 

'우리를 반대하는 그 어떤 군사적행동에도 신속히 대응할수 있는 국가방위력과 강력한 선제타격능력을 보다
강화해나가는데 더욱 박차를 가할것이다'라고 향후 방향을 내세웠다.

 

또한 북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문구를 통해 재차 강조하였다.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하여야 한다.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있는 한 조선반도정세를 주기적으로 악화시키는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것이다'

 

지난 3월의 한미연합훈련 시기에 발표된 담화와 거의 유사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8차 당대회때 천명하였던 '강대강 선대선' 원칙을 다시 강조하여 미국의 선제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여태까지 김여정의 담화문에 사용되지 않았던 

'나는 위임에 따라 이 글을 발표한다'가 추가된 것으로 보아 해당 담화문이 김정은의 의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김여정은 2020년 3월 첫 공개 담화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의 담화인 2021년 8월 11일 담화까지 총 14건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 중 대남 담화는 11건, 대미 담화는 3건으로 대남 담화의 비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김여정 담화의 주요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이든 행정부에 들면서 대미 담화의 주축이 외무성 위주로 옮겨진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2021년 김여정은 한 차례의 대미 담화-그것도 짧은 분량의-를 발표했던 것에 반해

리선권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리병철 군사 비서,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외무성 대변인 등의 담화가 

발표되는 등 대미 담화의 주체가 외무성의 실무-간부급 위주로 다양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무진 위주의 바텀-업 접근을 선호하는 바이든의 스타일에 맞춰 개조한 것으로 볼 수 있음과 동시에 

당분간 미국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것을 예상하여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의견을 지근거리에서 대변할 수 있는 급인

김여정의 위치를 대남으로 집중되게끔 옮긴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대남 담화의 논조가 주로 비난조인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자신들의 체제에 민감한 사안
-이를테면 한미연합훈련 및 주한미군 철수, 대북전단 살포, 코로나 등-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 이는 김여정이 김정은의 여동생이라는 혈연적 관계에서 

기인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즉 김정은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영역에 대해 김정은의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날 것 그대로의 반응 혹은 의견을 김여정을 통해 내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김여정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김정은을 보좌함과 동시에 김정은이 신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담화의 목적과 특성상 대외 매체에서 전부 발표가 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주요한 사안,

혹은 이를 사상적으로 이용하여 주민들에게 알리거나 교육해야 할 사안 및 담화에 한해서는 대내 매체에도 싣고 있다.

이를테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3일 전에 발표한 대남 담화의 경우 김여정의 대남 혁명 업적을 보도하기 위해 

<<노동신문>>에도 게재되었다는 관측이 있다. 또한 가장 최근의 담화도 <<노동신문>>에 실렸는데 이는 

현재 북한의 어려운 상황(코로나, 대북제재, 홍수/폭우 등)의 원인을 미국으로 돌림으로써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군사력 강화 행보에 대한 정당성을 주민들로부터 부여받고자 하는 시도로도 파악할 수 있다. 


김여정이 갖고 있는 특수한 정치적 포지션으로 인해 향후에도 계속해서 김정은의 '입'으로서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나타낼 것이 전망된다. 

이에 우리 당국은 김여정의 담화를 통해 김정은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고, 

향후 대응에 대해 보다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미지출처: Daily NK

지난 4월 15일, 

북한의 대명절인 '태양절'이었다. 

 

태양절을 맞아 

미사일 도발에 관련한 여러 예측들이

시도되었다. 

 

과연 태양절과 미사일 도발의

어떤 관련성이 있길래 

언론들은 태양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북한에게 

'태양절'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목차]

1. 태양절의 의미 

2. 김정은 시기 태양절의 관행 

3. 올해 태양절의 모습 

 


1. 태양절의 의미


태양절은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로

415일이다.

 

북한의 최대명절로도 꼽히고 있으며,

더불어 김일성의 아들이자

현 지도자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의 생일도

광명성절(216)

북한의 국가적 행사이다.

 

김일성의 생일은 본래 공휴일로는

지정이 되진 않았었다.

1962년에 김일성 탄생 50주년을 맞아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며

특별한 날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이후에 1968

북한의 정식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도

국가적 행사까지 할 정도의 명절로서

기능하진 않았다.

그러다 1974년에 중앙인민위원회에서

김일성의 생일을 민족 최대 명절로

공식 천명하며

민족 최대명절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19977월에

김일성 3년상을 마친 후

주체연호를 채택하며

태양절이라는 명칭으로 격상시켰다.

김일성이 사망할 때부터

이와 같은 김일성 우상화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지도자였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추모하는 행사에서

서거날을 태어난 날보다

뜻깊게 기념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태양절 행사는

불꽃놀이나, 무도회, 여러 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크게 진행할 때는

열병식까지 거행한 적도 있다.

 

태양절이 항상 화두인 이유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바로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국제사회나 혹은 특정 국가에게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하였을 때

목소리를 내는 목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태양절과 같이 국가적 대행사가 있을 때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많은 언론이

북한의 태양절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2. 김정은 집권 후 태양절의 관행


2012

김정은이 본격 집권하고 나서

100번째 태양절을 앞둔

413일에 ICBM급인 광명성 3호를 발사했다.

김일성 생일 100주년을 맞아 열병식도 진행했다.

 

태양절 당일에는

처음으로 평양 김일성광장에 모습을 드러내

공개 연설을 하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김정은은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영림, 김경희 등 당과 내각 간부와 함께

참배에 나섰다.

 

20134월에 태양절은

20124월에

본격 집권한 시기 이래로

사실상 처음 맞는 태양절이었다.

김정은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고,

이 관행은 김정은 시기 계속 이어지고 있다.

 

 태양절을 기념해서

주민들에게 쌀, 기름 등을 주는

특별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예년에 비해

행사들이 좀 작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김정은의 업적을 크게 부각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김정은은

최룡해, 장성택, 현영철 등

군 핵심인사들을 대동하고

금수산 태양궁전에 참배했다.

북한을 둘러싼 대외 정세가 긴박했기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 말고

다 군복을 입은 간부들이 김정은을 뒤따랐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2014년에는

태양절 전날 열리는

중앙보고대회에 김정은은 불참했고,

이로 인해 김정은의 건강이상설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당시에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불꽃놀이 행사등 행사에 관련된 보도를 했고,

군사퍼레이드나, 무력도발은 없었다.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도

조용히 간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태양절은 가장 전형적인 해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태양절 하루 전인

414일 평양체육관에서

중앙보고대회가 열렸고,

··군 고위 간부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만수대 언덕, 대동강반, 반월도 등등

평양시내 곳곳에서 행사가 열렸다.

이 당시 태양절에는

김정은 리설주 부부가

만경대상 체육대회에 참석하여 관람한 것으로 보아

스포츠 대회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는

황병서 군총정치국장, 리영길 총참모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등

군부 최고의 장성인사만 데려갔다.

이는 군부가 지도자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의미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또한 12일부터는

예술인을 모아놓고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 등 

여러 전시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군사적 도발도 이루어졌는데

419일 신형 방사포 KN09 2발을

발사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태양절 새벽 벽두부터

무수단 중거리탄도미사일(무수단 BM-25) 시험발사를 했지만,

패했다.

일반 근로자 등 백여 명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주고,

군에서도 대폭 승진이 이어졌다.

또한 예년과 다르게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으로

군에서 원수 칭호를

김정은 시기 김정은 다음으로 받은 사람이

김영춘 인민무력부장과

현철해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이었다.

 

이는 마지막 인민군 원수였던

리을설이 사망한 이후

 김정은 제외 첫 원수칭호를 단 사람들이었다.

금수산에 참배 또한 역시나 인민군 장성들과 함께 방문했다.

그 동안 공포통치와 70일 전투로 인해

북한 주민을 어렵게 했던

김정은이 제 7차 당대회를 앞둔 시기에

민심달래기에 나선 것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2017년은

김일성 생일 105주년을 맞이한 태양절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태양절 당시

열린 14일 열린 중앙보고대회에

김정은이 참석했고,

대규모 경축 열병식이 있었다.

5주년과 10주년을 꺾어지는 해로 부르며

정치적으로 중시했던 연도이니 만큼,

큰 대규모 군사행사로 치러졌다.

이 때,

KN08이나 KN14등 기존 ICBM과 더불어

신형 ICBM으로 추정되는 미사일까지 공개되었다.

그리고 방사포와 같은 전략무기를 총동원하기도 하고,

화생방부대가 흰 제복을 입고 첫 등장하기도 해서 주목받았다.

이 당시,

미사일 개발 핵심인력인

리병철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육군대장으로 승격되어 큰 주목을 받았는데

금수산태양궁전에도 참배하여 주목받았다.

 

나중에 이 인물은 원수 격으로 승진되었으며,,

현재 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에 있다.

 

2018년은 2017년과 다르게 조용히 치러졌다.

문화 체육 행사를 벌이고,

2018년이 한반도 대화의 해였던 만큼,

대남 도발 언행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군사적 동향도 없었다.

14일 열린 중앙보고대회에서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은

자위적인 군사노선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2018년 참배모습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하지만, 예년과 다름없이

금수산 태양궁전 참배에는 참석했다.

최룡해,박광호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봉주 내각 총리,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정 간부들과 참석했다.

이 날 관련 보도도

좀 늦게 나와서

전년도와 다르게 조용히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9년에도 태양절을 비교적 조용히 보냈다.

415일을 앞두고

북한은 당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그리고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과 국가최고지도부를 정비했다.

 

권력을 재편한 김정은은

금수산 태양궁전에

노동당과 최고인민회의 간부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했다.

 

이날,

노동당 상무위원인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으며,

김재룡 내각 총리 등

정치국과 국무위원회 간부들이 수행했다.

 

또한 태양절을 하루 앞두고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의 영도는

곧 김일성 수령의 영생 실록이라고 보도했는데,

다른 보도문에서도 김일성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대내외적인 국가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한 김일성처럼

김정은도 대외적인 국가대표자가 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2020

태양절에 김정은 위원장이

보이지 않으면서

신변이상설이 제기 되었다.

 

매년 조용하게라도 참석하던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도들은 근거없는 얘기로 드러났다. 

 

또한, 태양절 전날인

14일 단거리 순항미사일 발사 현장을 참관했고

군사합동훈련도 감행했다.

 

강원 원산인근인 이곳에서 참관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은

정황이 포착되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코로나19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기도 했다.

 

이렇듯 김정은에게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는

중요한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때는 단 3차례밖에 하지 않았던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는

태양절과 더불어 광명성절, 신년 등

정치 행사에서는 빠지지 않는 관례가 되었다.

 

특히 매번 참배할 때마다 주목되는 것은

함께 참석하는 인원인데,

보통은 당˙정˙군의 최고 대표자들과 함께

참배를 하는 모습이었다.

 

코로나19가 한창 퍼지고 있던

2020216일 광명성절에는

참배 인원을 대폭 감소하여

최고위급 간부들만 참석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9년도 태양절 참배모습(위)과 2020년 광명성절 참배모습(아래)을 비교한 사진, 확실히 참석인원들이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지출처:한국일보


3. 올해 태양절의 모습


올해 415일 태양절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올해는 작년과 달리

예년과 마찬가지로

김정은이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날, 김정은이 대동한 인사는

리설주, 조용원 당 조직비서, 박정천 군총참모장,

김여정, 현송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었다.

이렇게 측근 인물들로만

참석인사를 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평소에 김정은과 함께 참배했던

당·정·군 간부들은 따로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현송월, 조용원, 김여정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보여준 것으로 알 수 있다.

올해(2021년) 태양절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모습. 이미지 출처: Daily NK

또한 박정천이 동행한 것은

국방력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국가적 행사, 특히 지도자와 관련된 의식은

연출된 행사로 우리는 태양절을 통해

북한 내부 권력 구조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세 가지의 관점으로

금수산 태양궁전 참배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 대한 분석은 Daily NK의 기사를 참조했음)

 

첫째, 참배에 참여한 인사들이다.

이번 김정은과 함께 참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정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최정예 멤버들이다.

 

지난 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를 소수인원이 참가해서라도

언제든지 개최가능하다고

규정을 변경한 것은

전염병 등 불안정성이 커지며,

이번 태양절처럼 정치적 행사에 

꼭 모든 간부들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다음으로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임무를 규제한 29조에 당중앙군사위원회는 토의문제의 성격에 따라 회의성립 비률에 관계없이 필요한 성원들만 참가시키고 소집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새로 보충함으로써 긴박하게 제기되는 군사적 문제 토의의 신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실천적 담보를 마련하였다”(2021.1.10. 조선중앙통신의 당규약 개정내용 보도)

 

그래서, 이번에는

김정은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는 사람들만

대동하여 그들에게 특별함을 부여하려는 의도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정치연출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출처:Daily NK

둘째, 김여정의 과도한 허리굽히기 인사이다.

선전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는 김여정으로 미루어봤을 때, 

선대에 대한 깊은 숭배감을 표시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로 비춰질 수 있다. 

 

셋째, 현송월이 사진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금수산 태양궁전에 동석한 사람들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자료에는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참석은 했지만,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의 위상은

아니라는 점과,

리설주-현송월 알력설 등

현송월을 둘러싼 여러 루머들을 잠재우기 위해

명단에는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이번 태양절에는

코로나 이전 수준의 규모로

행사를 진행했다.

합동공연 영원히 당을 따라

김정은은 리설주와 함께 관람했고,

불꽃놀이 행사와 기념 야회가 거행되었다.

 

행사를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치른 것은

코로나19 상황 관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풀이될 수 있다.

 

또한 당세포비서대회와 같은 김정은이

직접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들이

예년과 다름없이 개최된 것으로 보아

대면행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 북한의 최대 명절이자

국가적 행사인 태양절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대였던 김정일 시대와는 다르게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라는 특징을 잡아

김정은 시대의 어떤 정치 문화를

성해 나가려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전 세계적인 전염병 상황을 의식해서

참배 참석인원을 줄인다던지,

해와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이 코로나 관리를 잘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예년과 다름없이 행사를

거행한다던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은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

그리고 대외적으로 보이는

북한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북한만의 특징을 만들어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데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듯하다.

 

이렇게 태양절, 광명성절과 같은 

북한의 국가적 행사는 

북한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내부 권력관계에 대한 예측을 

가능케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세계 언론들이

북한의 국가적 대행사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2019). “북한 태양절: ‘김일성처럼 김정은을 국가의 대표로...‘사회주의 국가의 정상화’”,BBC KOREA, 415.

김정범, 박선영.(2018). “[레이더P] [랭킹쇼] 조용히 지나간 올해 김일성 생일...예년과 딴판”, 매일경제, 417.

태양절’, 나무위키.

조영빈.(2020). “태양절 참배 지도자 필참은 아냐 과거 김정일도 3차례만 참석”, 한국일보, 423.

이채은.(2021). “태양절 맞아 혜산 제대군관들에 특별 공급···불만 의식했나?”, Daily NK, 416.

곽길섭.(2021). “[북한정론] 김정은의 ‘4·15참배이면의 숨은 코드(code)”, Daily NK, 420.

(2013).“[클로즈업 북한] 김일성 생일, 긴장 속 조용히 치러져”, KBS NEWS, 420.

(2015).“목요진단 한반도”, KBS NEWS, 416.

이제훈.(2016). “김정은, 김일성 생일 맞아 금수산궁전 참배”, 연합뉴스, 415.

홍국기. (2018). “김일성 생일 태양절맞아 핵 언급 없이 비교적 차분(종합2)”, 연합뉴스, 415.

(2019).“북한 김정은, 고위 간부들과 금수산 태양궁전 참배”, 연합뉴스, 416.

 

이미지출처: RFA(자유아시아방송)

지난 3월 2일 북한에서는

'식수절'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식수절'은 우리나라의

식목일에 해당하는 날로 

주민들이 나무를 심도록 장려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오늘 포스팅은 

남한의 식목일(4월 5일)이 있는 

4월을 맞아, 

북한이 '식수절' 행사를 시행하게 된 

배경인 산림황폐화에 대해 다루고, 

그에 대한 국가정책을 

어떻게 관철시켰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목차] 

 

1. 북한의 산림황폐화 현황

2. 산림훼손의 영향 

3. 북한의 산림정책 

4. 남북산림협력


1. 북한의 산림황폐화 현황 


북한의 산림은 

당국의 토지정책 실패와 

자재난, 식량난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훼손되었다. 

 

국가건설 초기부터 

산지지역이 국토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산림을 적극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산림을 국유화하고 

사회조직이 산림 이용 및 관리를 하는

체계로 운영되어오고 있다. 

 

북한은

1976년에 '다락밭 건설투쟁'이라고 불리는 

밭을 개간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벌였다.

 

이 '다락밭 건설투쟁'은

부족한 평야를 보충하기 위해서

산지, 산림을 벌채하여 

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이런 활동이 산의 지력을 크게 훼손시켰고, 

산림이 산사태와 홍수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황폐화가 계속되다가

1990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와서는

전체 산림의 4분의 1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다. 

북한의 민둥산. 이미지 출처: 신동아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북한의 산림황폐화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 당국의 지원이 대폭 감소하여

'자력갱생'을 강조하였는데, 

이 때 북한주민들이 먹고 살고자,

대규모 벌목을 진행하고, 

무분별한 산지 개간을 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11년에 

영국의 위기관리 전문기업인 

'메이플클로프트'는 

북한의 산림 황폐화 정도가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전 세계 3번째로 

심각하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2018년

통일부에 따르면, 

'남북 산림협력관련 보도 참고자료'를 

통해 북한의 총 산림 면적 32%가 

황폐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2020년 7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북한의 산림면적이 

2010년 조사 결과에 비해 

21만ha(헥타르)의 산림면적이 

감소하였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평양 전체 면적 규모랑 비슷하다고 한다. 

 

2021년 3월에는

'글로벌 포레스트 워치(GFW)' 세계 벌목조사기관은,

2001년부터 2019년까지 

약 23만 3천 ha의 산림이 사라진 것으로 

분석했다. 

 

김정은 집권 시기에 그래도 

감소추세였던 벌목 면적은 

2019년 급증하여 2만 8천 ha 정도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조사기관 처음으로 

2만 ha를 넘은 것이며

주로 양강도, 자강도, 함경남도에서 

전체 벌목 면적의 64%가 이루어진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미지 출처: 38노스

 이러한 북한의 극심한 산림황폐화 현황이 

여러 기관에서 거의 매년 분석되고 있는 가운데, 

38노스에서는 2019년에 

북한의 산림녹화사업이 어느정도 진척이 있다고 분석했다.

 

위 사진은 

민간 위성에 포착된 북한 평양 인근의

산지지역이다. 

 

왼쪽에 황량한 황무지에서 

오른쪽 사진을 보면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평양 부근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이고, 

다른 지역들은

여전히 벌목이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2. 산림훼손의 영향


 

이러한 무분별한 산림 훼손은 

북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1) 수자원 관리가 취약해짐. 

 

벨기에 루뱅대학 부설 연구기관인

재난 역학연구센터(CRED)가 2007~2016년동안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북한의 자연재해 발생 빈도는 

(1) 홍수, (2) 태풍, (3) 가뭄 순으로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북한에서는 

홍수, 태풍, 산사태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작년 하반기만 보더라도 

여름철 태풍으로 인해 

북한당국은 수해복구작업을 

최우선과제들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었다. 

 

산림이나 습지가 황폐화된 지역은

물의 저장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다. 

 

다른 지역보다도 이렇게 

땅이 황폐화된 지역은 

하천 범람과 홍수피해에 

굉장히 취약하다. 

 

적정량의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인공 혹은 자연적인 물 저장 시설이 

부족하게 되면, 물의 빠른 증발로 인해서 

물부족 현상으로 이어져 가뭄이 발생할 수도 있다.. 

 

2019년 9월 발생한 

제 13호 태풍 링링이 북한 지역을

관통한 후 국제적십자연맹이 

당시 피해인구를 530만명으로

추산한 것으로 보아, 

북한주민들에게도, 북한 당국에게도 

산림황폐화가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2) 온실가스 배출

 

산림파괴로 인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전세계 자동차, 비행기, 선박, 기차 등

운송수단이 배출하는 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북한은 물론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이 상당히 적긴 하지만, 

이 탄소배출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항상 관심을 가져왔던 부분이기도 했다. 

 

북한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0.9톤인데, 이는 남한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온실가스 배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탄소배출권 때문이다. 

 

탄소배출권은 국가나 기업이 

일정기간동안 온실가스의 일정량을

배출할 수 있는 권리인데, 

온실가스가 감축되어 

탄소배출권이 남아있는 국가가 

탄소배출권 할당량을 초과한 

국가에게 그 권리를 팔 수 있다. 

 

바로 북한이 탄소배출권의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여 

외화벌이를 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북한의 탄소배출권 판매는

대북제재로 인해 막힌 상황이다. 

 

또다른 이유로는, 

북한의 심각한 에너지난을 

국제적인 지원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3) 식량난, 경제난 가중

 

북한이 산림조성에 

열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식량난과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함이다. 

 

북한의 국토 80%가 산지지형이다보니, 

이 지형을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게 

이용을 해야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경제림을 조성하는 사업이 

바로 북한이 강조하는 

'인민경제의 자립'을 기르는 데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자립심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북한에게는 사회주의 강성국가로 가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3. 북한의 산림정책


북한은 이렇듯, 

산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정책으로 관철되오고

있었다. 

 

1992년 북한은 '산림법'을 제정하고

1996년에는 '국토환경보호부'를 설치했으며, 

1998년에는 '국토환경보호성'을 신설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남한이나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하여 

'평화의 숲', '겨레의 숲' 등 민간단체들이 

북한의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고자 지원사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국가적인 계획으로서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를 

기간으로 정해둔 

'산림조성 10개년 계획'이 

있었다. 

 

이는 김정일이 황폐해진 

산림을 살리고자 진행시킨 계획인데,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김정은 집권 시기에 들어서자 

김정은은 이 산림복구사업을 

굉장히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였다. 

김정은의 목적은 

북한을 '정상국가화' 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민들 생활의 근간이 되는

국토관리사업부터 먼저

하려는 것이었다. 

 

2013년에 김정은은 

산림복원정책을 국가적 전략으로 

중요하게 인식하였고, 

이 정책은 파괴된 산림생태계를 

빠른 기간 안에 회복하며 

생태계 보호구를 넓히려는 목적이었다. 

 

산림복원 정책이 수립된 이후,

김정은은 매 신년사에서 

산림복구과정의 성과를 언급하면서

산림복원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2012년 4월에는

'국토관리 총동원운동 열성자 대회' 담화에서

토지관리 사업에 대해 강조함과 동시에 

산림조성, 보호관리 사업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2022년 안에 

북한의 모든 산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라며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6월에는 

재난관리 기본법인 '재해방지 및 구조, 복구법'을

제정하여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재난관리 4대 기본개념

(예방, 대비, 대응, 복구)을 수용했고

재난총괄 및 담당기관을 

제도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행령이 미비하고, 

최고지도자의 교시나 현지지도가 

법보다 우선하는 상황이기에 

임기응변식 대응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2014년 11월 중앙양묘장을 현지지도 하기도 하고

2015년 김정은의 노작

'전당, 전군, 전민이 산림복구전투를 힘있게 벌려 

조국의 산들에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자'를 

발표한 기점으로 

김정은의 산림정책을 위한 조치들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산림조성 10년 전망계획'이 세워졌는데 

2022년까지는 나무심기, 2024년까지 

사름률(심은 총 대수에 대한 산 대수의 백분율)을 

높이는 등 산림보호사업에 집중하였다. 

 

김정은 노작에서 언급되었던 

'산림복구전투' 또한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산림복구전투는 2단계로 이루어져있는데

1단계나무심기, 묘 재배기술을 도입하는 것이고, 

2단계산림조성, 묘목 생산, 종자확보, 심은 나무 가꾸기, 

산사태 및 산불 예방공사 등

양묘장 현대화와 과학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2019년 북한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1단계 계획은 끝났고 

2단계 계획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산림복구전투 2단계 기간은

2018년부터 2024년이다. 

 

그럼에도

 당시 산림황폐화 면적은 확대된 것으로

분석되었는데, 

이는 궁핍한 주민들이 

여전히 벌채를 진행한 것과, 

양묘장 기술이 부족한 것이 

그 이유로 꼽힌다. 

 

북한의 산림황폐화를

타개하기 위한 열망은 

교육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2017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산림과학과가 신설되었고 

2018년에 산림연구원이 건설되었다. 

산림과학자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2019년에는 '산림할당제'라는 제도를

도입하는데, 

각 도,시,군의 기관이나 기업소 , 단체에

일정 구역을 할당하고 

자기가 심은 나무는 

자기가 관리하도록 하는 

책임제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농업경영방식도 

산림벌채를 최소화하기 위해 

'임농복합경영방법'으로 바꾸기를 

장려하고 있다. 

 

임농복합경영방식은 

뙈기밭에 나무를 심는 것에 대해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자, 

토지보호 목적으로 

나무, 농작물, 약초등을 결합하여 재배하는 방식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 그림과 같다. 

출처: 북한농업동향(KREI)

그림과 같이 산림재배구역과

농작물 재배구역을 등고선처럼

나누어 함께 경작하는 방식이다. 

 

아까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매년 '식수절'(3월 2일)에 

나무심는 활동 또한 

북한의 삼림보호정책을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에 대해 

북한은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주민들이 동참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작년과 올해 모두 

'식수절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4. 남북산림협력


2018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평양 정상회담 선언문에 

남북은 산림협력을 명시했었다. 

 

그에 따라, 산림청 산하에 

남북산림협력센터를 두고 

묘목지원이나 양묘장 건설과 같은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남북산림협력센터는

단기적으로 종합적 계획과 

부처협의를 통해 북한에 신규 조림 또는 

재조림 시범사업을 벌일 계획을 갖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의 탄소배출권을 확보하고

이익 배분 등을 통해 탄소흡수원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북한과의 합작 사업을 

금지하는 제재사항으로 인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환경과 관련된 사안이다 보니, 

보건 및 의료분야보다는 

협력이 제한될 부담이 적다. 

 

또한, 

남북관계가 극단으로 치닫을 때에도, 

남한의 민간단체들을 통해 

대북산림지원을 타진한 것으로 보아, 

산림과 같은 국토관리 분야에서는 

북한의 계속적인 수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사람을 돕는 인도지원은 

북한이 체제의 문제로 받아들여 

실상 공개를 꺼려하기 때문에, 

산림협력이 북한의 적극적 동참을

더 이끌어 낼 수 있다. 

 

산림협력을 더욱 더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일각에서는, 

유엔 및 국제기구와의 협업을 통하여 

황폐화 실태를 공동으로 조사하고, 

정책을 개발하거나 기술이용방안을

만들어 이러한 비정치적 공간에서 

다자 간의 국제협력으로 인해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북한의 심각한 산림황폐화 실태와 

북한의 산림 정책, 

또 남북산림협력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전세계의 관심이 환경으로 쏠린 것처럼

북한 또한 국가를 유지하는데 

국토관리가 절실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는 지난해 

파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남북산림협력센터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평소 알려져 있는 

남북산림협력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했고, 어떤 식으로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 때의 견학으로 모든 의문점이

풀렸다. 

 

남북산림협력센터(직접 찍은사진, 촬영일:20.11.21)

 

스마트 양묘장(직접 찍은 사진, 촬영일:20.11.21)

스마트 양묘장에서 기른 양묘들을

북한으로 보내서 그곳에

심는 방식으로 협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스마트 양묘장에 대한 기술 

이전의 계획이 있다고도 설명받았었다.

 

스마트 양묘장은 

물의 양이나 온도, 습도 모두 

자동화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용한 용수 역시 재활용이 

가능하여 훨씬 경제적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첫 사업이었던 것인 만큼, 

스마트 양묘장에서 잘 자란 

묘목들이 북한의 산에 심어져서 

북한 주민들이 재해에도 

안심할 수 있는 생태환경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렇게 북한이 꼭 필요한 것에 대한

주시를 지속하여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남북 대화 노력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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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7장 '남북관계와 통일'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미소 냉전과 맞물려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 한반도는 1948년 남과 북에 서로 다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3년간의 처절한 전쟁은 남북의 분단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남북이 분단된지 70여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고 '통일'이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라는 것 만큼은 여전하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에 대해 정리해 보고 통일에 대해 짧게 논해보도록 하겠다.


 

1. 남북관계의 이중성

남북 관계는 '이중성'이라는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남과 북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제거해야 할 '적'이라고 인식함과 동시에 화해협력해야 하는 '동포'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 후, 탈냉전시기의 도래로 인해 한반도에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며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과거 냉전시기 남북은 상대의 유엔 단독 가입 또는 남북한 동시 가입을 반대해왔다. 하지만 냉전종식 이후 북한은 1991년 9월 제46차 총회에서 남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을 신청하였으며,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두 개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남북이 두 개의 한국으로 인정받았으나, 양국은 내부적으로 남북관계가 두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내부문제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는 1992년 2월에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양측의 관계를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함으로써 그 관계성을 명문화 하고 있다.  즉, 남북관계는 민족내부의 관계만도 아니고 국가 대 국가의 관계만도 아닌 두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특수한 관계인 것이다.

 

 

2. 남북관계 전개양상

 

-1960년대: 북한의 적극적 공세와 남한의 소극적 대응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네바 회담이 열렸으나 서로 간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으며 전쟁으로 인해 상호간의 적대감 고조로 전후 당국 간 대화는 끊기게 되었다.

 

1960년대 남북관계의 양상은 상호 적대관계 속에 '남한의 무대응과 북한의 평화전술'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평화전술이라는 말에서 생소함을 느낄 수 있지만, 이는 당시 북한이 현실적으로 평화를 추구했다기 보다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통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바탕으로 '과도적 연방제'와 같은 적극적인 교류협력 제안과 통일전선에 입각한 통일 논의를 제기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조선 내부의 자체 혁명을 강조하는 이른바 '남조선혁명론'을 내세워 대남전략을 강화하였다.

이에 남한은 '선건설 후통일' 노선을 내세우며 북한 주도의 통일 논의를 회피하였고, 기존의 유엔감시하 인구비례 총선거 통일 방안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1970~80년대: 체제경쟁과 간헐적 대화

 

1970년대 들어 남북관계는 본격적인 체제경쟁에 돌입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선건설 후통일 노선을 계승하였으며, 성장을 통한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선택하게 된다. 1970년 '8.15 선언'은 무시전략으로 일관하던 과거의 입장에서 벗어나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을 강조하며 남한의 체제경쟁 의사를 밝혔고 볼 수 있다.

 

북한도 통일정책에 있어 '민주기지론'을 포기하고 '남조선혁명론'으로 전환함으로써, 위에서 밀고 내려가는 식의 통일이 아닌 남한의 혁명 발생을 지원하는 체제경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70년대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남북간의 간헐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남북은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합의내용 해석에 대한 서로간의 이견과 함께 상호간의 신뢰가 부재와 더불어 데탕트 분위기에 의한 수동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다.

 

이와 같은 양상은 19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한반도 긴장완화 방안인 평화협정 논의을 두고 북한은 평화협정을 남한은 불가침조약 체결을 내세웠고, 통일방안에 있어서도 김일성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전두환 정부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84년 아웅산 폭파사건과 같은 북한의 암살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수해피해에 대한 북한의 수해물자 지원을 통해 적십자 회담이 성사 되었으며 1985년 8차 적십자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교환방문을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그해 9월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등 간헐적 남북간의 대화가 성사되었다.

 

 

-1990년대: 체제경쟁 종결과 상호인정

 

1990년대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 이후 체제경쟁은 사실상 남한의 승리로 끝이났고 남북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체제경쟁에 패한 북한은 상시적인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체제유지와 생존을 위해 상호 체제인정과 공존의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북한의 느슨한 연방제 주장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동의, 유엔 동시 가입 수용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 시기 한국은 체제 우위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상호 인정과 공존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7.7 선언'을 통해 적이 아닌 '동반자'로 북을 규정했고,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반안'에 따라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 두며 남북경협 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93년 본격적인 북핵위기로 인해 남북 관계는 다시 갈등관계로 돌아가게 된다.

 

 

-2000년대 이후: 협력관계로 전환노력과 북핵으로 인한 관계 경색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며 '햇볕정책'을 추진하였고 대결이 아닌 화해와 협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 배제와 대북지원을 통해 남북간 교류를 활성화 했으며 북미 간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를 토대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추진되었고 나아가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화해적 협력관계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평화번영정책을 바탕으로 대북포용책을 펼치려 햇지만 임기 동안 북핵문제로 인해 실질적으로 한계를 보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인한 금강산 관광 중단과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관계 경색은 가속화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였지만 북핵으로 인한 관계 경색국면은 여전히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3. 통일의 성질: 역동성과 진보성

 

지난 독일과 예멘의 통일 사례를 보면 대등한 통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독일은 흡수통일의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멘은 총선에 의한 대등통일을 합의한 뒤 일방적 무력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결국 합의통일이란 사실상 일방이 타방을 흡수한 후 사후 추인하는 외적 정당화 절차 또는 치열한 역동적 통일과정을 알리는 역할임을 지난 사례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우리는 통일이 현실적으로 힘의 역관계에 따라 급속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역동성을 간과해서는 안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은 남과 북 구성원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며 '더 나은 통일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보성을 띄어야 가능하다. 통일을 논할 때 '비용'의 문제가 가장 많이 대두되 듯이 통일을 당위성의 측면에서만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치열한 현실속에서 양측의 국민들에게 통일을 통한 더 나은 삶이 약속되지 않는다면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부정적일 것이며, 평화적이지 않은 방식의 통일은 국가에 큰 타격을 주어 퇴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5). 「남북관계 지식사전」.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5장 '핵무력과 경제건설의 딜레마'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북한군의 정식 명칭인 '조선인민군'은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같은 해 2월 8일에 지금의 '조선인민군'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군사 조직은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을 점령했던 소련에 의해 생겨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창군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202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행진하는 조선인민군의 모습


1. 조선인민군 창군과 한국전쟁

 

상술했듯이 조선인민군은 1945년 해방 후 소련 점령군에 의해 조직되었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보안 조직들이 나타났었는데, 소련은 이러한 조직들을 해체·정비하고

'보안대'들을 창설하였다. 1946년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자체 군사력 확보를 위해 

'보안간부훈련대대본부'와 '보안간부훈련소'를 창설하였고, 전자는 이듬해 5월 17일 임시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산하의 

'북조선인민집단군 사령부'가 되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2개 보병사단과 1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공표하였고, 총사령관으로 최용건, 총참모장으로 강건을 임명하였다.

 

최용건 초대 조선인민군 사령관의 모습.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조선인민군은 소련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소련식 편제를 모방하여 계급제도를 확립했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출발했던 조선인민군은 1949년 4개 사단으로 증편되었고, 광범위한 징병을 바탕으로 

1950년 6월까지 3개 사단을 추가로 편성하게 된다. 

 

조선인민군은 창군 이래로 계속해서 군사력의 확장을 꾀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에 비해 신속한 국가 건설 과정과 경제성장의 이점에

힘입어 소련의 동의와 군사차관을 얻어냄으로써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한반도 무력 통일을 시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총병력은 10개 사단(7개 전선 배치, 3개 예비), 1개 전차여단, 2개 독립연대,

3개 내무성 경비여단 및 소규모의 해·공군 등으로 구성된 13만 5천 명 이상이었다. 

이는 남한 병력 9만 8천 명을 압도한 수치였으며, 조선인민군은 당시 남한 군대에는 없었던 중장비(전차·항공기 등)를 

보유하고 있었다. 압도적 전력차와 더불어 조선인민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한국전쟁 초반에는 북한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나, UN 등의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인해 양측은 지금의 휴전선을 경계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소모전을 계속하였고, 1953년에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정전이 체결된 후 남북한 모두 본격적으로 군비증강을 계속하였는데, 조선인민군은 1953년 7월 정전 무렵의

27만 5천 명~31만 명에서 1955년까지 41~42만 명으로 증강하였다. 또한 1959년 2월 정규군 조직 이외에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하는 민병 조직인 '노농적위군(당시 대)'를 창설하게 된다.

 

 

북한 국가우표발행국이 노농적위군 창건 55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새 우표. 출처 : 통일뉴스

※ 노농적위군

 

노농적위군은 1959114일 창설된 북한 최초의 민간군사조직이다.

평상시에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면서 민방위 업무를 수행하고,

유사시에는 군과 함께 지역 방어임무와 같은 정규군 보충 및 군수품 수송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만 17~60세까지의 남성과 미혼여성 중 교도대 미편성자와 노동자/농민/사무원(남자 위주) 등을 대상으로

직장 및 행정단위별로 편성되어 총 대원이 약 570만여 명에 이르는 규모면에서 가장 큰 군사조직이다.

 

 

2. '국방에서의 자위'와 군사력 증강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 강화를 위해 북한은 지속적으로 움직여왔다.

특히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를 결정하고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국방의 자위'와 이를 위한 '경제·국방건설 병진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66년 북한은 본격적인 군비 확충에 나서게 됐는데, 그 이면에는 

1965년 미국의 월남전 확전과 한·일 국교정상화 및 한국의 경제성장이 북한에 안보위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66년의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북한은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 '전군간부화' 및 '전군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확립하고, 경제·군사건설 병진책을 재천명하게 되었다.

 

* 4대 군사노선에 대해서는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1.2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권력 기구> 3. 군 조직

 

또한 주체사상의 한 기둥으로 '국방에서의 자위'를 천명하고, 군의 현대화 방침을 내세움으로써 그 결과

국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1961~1966년 사이 평균 19.8%에서 1967~1971년 사이에 평균 30.9%로 

약 1.5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군비 지출은 자원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으며, 

북한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북한의 GDP 대비 군비 지출은 2006년부터 2016년 동안 약 23.3%를 기록하며 11년 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2016 세계 군비지출 보고서)

 

그럼에도 북한은 4대 군사노선으로 집약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인민적 전국가적 방위체계'를 수립하고, 이를 통한 ①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보위한반도 무력 통일이라는 

두 가지 국방정책의 목표를 강조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화를 통해 당시 남북한의 기준으로 현대적인 

MIG-21 전투기, SU-7 전폭기 등 수백 대의 항고기, SA-2 대공미사일, 잠수함 등을 소련으로부터 도입함으로써

한국에 비하여 질적으로 우월한 군사 전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72년부터 1984년 사이에는 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으로부터 이렇다 할 신예 항공기나 미사일 도입은 없었는데,

이는 북한의 막대한 군비 지출에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현대화'가 1970년 초까지 어느 정도 기반을 

정비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1980년대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증강'에 대처하여 한반도의 군비경쟁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 혹은 최소한 균형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1980년 초 김정일은 기계화부대의 병참을 강조하며, 

수천 문의 자주포를 양산하고, 낙후된 공군력 및 방공 능력의 현대화를 꾀했다.

 

그러나 북한은 점차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질적 군비증강에 필적할 수 없게 되어 

'노동집약적 군비경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과 경쟁할 수 없음에도 군사 병력을 

100만 대군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아래는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한 표이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 출처: 2020 국방백서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은 경제난으로 인해 병력 증강 이외의 군비 증강 혹은 

'재래색 군비 증강'이 여의치 않게 되자 경제적 부담이 큰 재래색 군사력의 현대화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전략무기의 확보에 힘쓰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억지력 증강이라는

이른바 '비대칭적 군비경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북한은 비대칭적 무기의 대표인 핵을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의 시점에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핵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2.27 - [북한의 동태] - [2020년 12월] 북핵

 

북한의 국력으로는 재래식과 비재래식 군사력을 모두 동시에 강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재래식·비대칭 전력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최근 개발에 성공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을 비롯한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최근 들어 경제난 타개를 위한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한 가운데, 북한의 군사력 증강 행보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비대칭 전력의 강화 여부 때문이며, 철저한 대비를 위해서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국방부. (2020). 「2020 국방백서」.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이미지 출처: NEWSWEEK

※ 해당 게시글은 현대북한학강의』 '제 6장. 북한주민의 일생과 변화하는 양상'을 참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은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은 폐쇄적인 국가이다.

 

따라서, 우리가 북한 주민들의

진솔한 생활상을 알려면

탈북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얘기를 통해 

진실을 듣고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북한의 제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들보다도 

북한이 표방하고 공표하고 있는 

교육제도나 사회제도 전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북한의 사회는

'유기체적 국가관'에 의해 움직인다. 

'유기체적 국가관'이란, 

수령-당-대중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직 속의 개인'을 강조한다.

이는 대표적 북한의 구호인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에서도

잘 나타난다. 

 

1. 출생 및 양육기관 


북한에서 출생은 

곧 사회적 재생산이며

국가 구성원인 '인민'이 태어나는 것이다. 

 

출산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곳은

"평양산원"이며, 대표적 여성종합병원이다. 

하지만, 역시 아무나 가지는 못한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해야하는데 

우리나라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분주소'를 통해 이루어진다.

 

분주소에서 출생신고 양식을 받아 

출생지, 성명, 생년월일 등을 적고 

인민반장한테 확인도장을 받은 후에

분주소에 이 양식을 제출하면 

출생증을 발급해준다. 

 

출생증은 후에 '공민증'

(우리나라로 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까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서 '공민증'은 

만 17세에 발급하고, 

현재는 수첩형태로 

발급받는다. 

 

원래 북한은 배급체 체제가

잘 이루어졌을 때에는 

이 등록절차가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지는 

절차였다. 

 

출생등록절차가 이루어진 후에

아버지의 직장에 아기를 등록하여

2살이 될 때까지 

하루 50g의 식량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2. 양육기관 


북한의 대표적인 양육기관은

'탁아소'이다. 

 

'탁아소'는 

만 2세까지의 '어린이반',

만 3세가 되면 '유치원 진학준비반',

만 4세가 되면 '유치원 낮은반'으로

분류되어 운영된다. 

 

탁아소의 목적은 

여성의 노동력을 유인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집단주의 교육 및 사회화를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 

 

탁아소에서의 

교육과정은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북한 대부분의 부모들이 

생계현장으로 나가야 하기 떄문에

아이들을 맡긴다고 한다. 

 

3. 교육기관


'탁아소'의

'유치원 낮은반'

만 4세가 되면 들어갈 수있는데, 

본격적으로 집단주의적 규율이 학습되는 곳이다. 

 

일과표에 따라 소위 '주체형 인간'을 위한 

학습을 시작하고,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은

영재교육의 대상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만 5세가 되면

'유치원 높은반'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의무교육 대상에 들어간다. 

낮은반과 마찬가지로

집단주의적 교육을 지속한다.

 

'유치원 높은반'이 끝나고

만 6세가 된 북한 아이들은

'소학교'에 들어간다.

 

북한의 입학은 매년 4월인데,

소학교 입학식을

북한에서는 굉장히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고위관료까지 참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북한의 '소학교'는 

원래는 4년제 였으나,

2012년 개편 때 5년제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6세부터 10세까지 

소학교에서 교육받게 된다. 

 

남한의 초등학교와

학교생활자체는 다를 바가 없지만,

1학년 때 담임이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소학교'에서의 수업은

주로 정치교육, 기술교육 위주로 이루어진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김정숙의 어린시절,

사회주의 도덕, 국어, 수학, 자연, 음악,

체육 등 13개 과목을 듣게 된다. 

 

방과후에는 소조활동(동아리활동)도 

있는데 이때는 

예체능 및 컴퓨터 교육이 이루어진다.

 

북한 아이들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소년단 조직'에 가입하게 되는데,

'소년단 조직'은

만 7세~13세에 해당하면

모두 소년단에 가입되며, 

소속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소학교 졸업 후에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과거 명칭은 '고등중학교'였고, 

2002년 교육 개편 때 '중학교'로 명칭이 

변화되었고, 

2012년 교육제도 전면 개편 당시,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로 분리되었다. 

 

소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며, 

중학교까지의 교육은 

2012년부터 

무상교육이 되었고 

2017년 4월부터는 

전국적으로 무상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중학교 또한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중학교에서는 

당정책, 김일성의 혁명활동과 혁명역사, 국어, 

사회주의 도덕, 한문, 외국어, 조선역사, 

세계사, 조선지리, 세계지리,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음악, 미술, 공작, 전기기계실습, 

제도 등 약 23개 과목을 배운다. 

 

중학교 과정부터는 

국가의 부름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봉사'와 '청년동맹'이 

대표적 동원활동이다. 

 

'노력봉사'는 건설현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2012년 이후에는 최소화되거나

금지되었다. 

'청년동맹'은 

만 14세가 되면 '소년단 조직'에서

'청년동맹'으로 조직을 이동하게 된다. 

 

'청년동맹'은 

처음엔 '민주청년동맹'으로 

시작했다가 북한의 사회주의화가 완성된

1964년 이후부터는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일명 사로청)'으로 개칭, 

1996년 김일성 사후에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바뀌게 되었다. 

 

김정일 시대 때는 

해마다 발표하는 신년사설을 

'청년동맹'의 기관지인 

'청년전위'에까지 기고할 정도로 

청년을 우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청년동맹'에 가입하게 되면

'붉은청년근위대'라는 

비정규 군사조직에도 가입하게 된다. 

 

별도의 영재교육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특수한 자질이나 신분이 있는 학생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특수교육기관으로는 

수재 양성을 위한 제1중학교, 

평양외국어학원, 만경대혁명학원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금성학원, 평양음악학원, 

남포중앙체육학원, 

김정일예술학원 등 

예체능계 학교도 있다. 

 

영재학교 학생들은

노력동원에서도 면제되며, 

대학입학시험에서 예비고사를 통과할 수 있는

혜택이 있다. 

 

'제 1중학교'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영재 육성을 

주로 하고 있으며, 

1984년에 평양에 처음 설립된 후, 

이듬해 남포, 개성, 청진, 혜산 등

각 도 소재지와 특별시로 확대되었다. 

1999년에는 

전국 시·군·구역에 1개교씩 

추가 신설하도록 확대되었다. 

'제1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출신성분뿐 아니라 

과학 및 수학 성적이 우수해야 한다. 

전문대 수준의 특수교재로 

자연과학, 컴퓨터 ,영어 등을 배운다,

 

이들은 대부분, 김일성종합대학교나, 

평양의 리과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에 진학하여

북한 중앙에서의 엘리트로 성장한다. 

 

'평양외국어학원'을 비롯한 

외국어 특수교육기관은 

6년제 중학교 과정으로 

영어, 중국어, 일어, 러시아어 등 

8개 국어를 중점적으로 교육시킨다. 

이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소학교 졸업자로서 

혁명 유자녀, 영웅 칭호 수여자 및 

영예군인 자녀들 가운데 

외국어에 소질이 있는 학생이다. 

 

가장 유명한 

'만경대혁명학원'은 

혁명 유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1947년 10월,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으로

출발하여, 58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초기에는 김일성과 빨치산 파의 

자녀들과 직계 가족들만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희생자 자녀, 중앙당 부부장급 이상의

고위간부, 빨치산 출신의 자녀, 

남조선혁명가와 순직한 2급 이상

기업소의 지배인, 기사장의 자녀들에게도

입학 기회가 가고 있다고 ㅎ나다. 

 

11년제로 시작하였지만, 

중학교 6년 과정, 단과대학 2년과정의

8년제로 개편하여 

11세부터 19세까지 

혁명학원에 다니게 된다. 

 

졸업 후에는 

주요 정치, 군사 엘리트로 성장한다. 

 

이외에도 

강반석유자녀대학, 남포혁명학원,

새날혁명학원, 해주유자녀혁명학원 등 

다양한 특수교육기관이 있다. 

 

일반 북한주민들은 

중학교 졸업 이후, 대학을 가지 못하면, 

남자는 군대, 여자는 직장으로 

사회진출을 하게 된다. 

 

만약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면, 

남한과 같이, 입시시험을 

보게된다. 

 

입시는 예비시험과 

본시험, 2단계로 구성된다. 

 

예비시험은 국가고시의 성격이고

본시험은 대학별로 보는 고시인데, 

수학, 물리, 화학, 영어, 문학 및 혁명역사를

2일에 걸쳐 3과목씩 치른다. 

 

예비시험에서 통과해야 

추천을 받아 본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일반적으로 

예비시험 합격률은 

전국 중학생들의 20%정도로, 

이 중 10%만 대학을 바로 진학한다고 한다.

 

바로 시험을 합격하여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들을 '직통생'이라고 부른다. 

 

대학에서 떨어지면 

바로 군대나 직장으로 배치된다. 

 

북한대학은 

종합대학과 

전문대학, 특수대학으로 나뉜다. 

 

종합대학은 

대표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고려성균관경공업종합대학이 

있다. 

 

공장대학, 농장대학, 

광산대학, 어장대학 등은 

생산현장과의 관련성이 있는 

일종의 전문대 성격이다. 

 

특수대학에는 

금속대학, 석탄공업대학,

기계대학, 건설건재대학, 철도대학, 

경공업대학 등 특수분야 전문적 교육을

담당한다. 

 

교원을 양성하는 

교원대학은 3년제인데, 

유치원 교양원과 소학교 교원을 양성한다. 

 

전문대학 또한 3년제이며,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은 

4~6년제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의 대학은 등록금은 없지만, 

의무를 부과하고 강제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보다 높은 조직생활을 하게 되어

'교도대'로 편성이 된다. 

 

교도대는 2~3학년 사이에 

6개월 간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는 

의무를 지는 조직이며, 

교도대 복무 졸업증이 없으면

대학졸업을 할 수 없다.

 

출처: 북한정보포털

 

4. 노동과 여가생활


 북한에서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주민들의 직장을 배치한다. 

 

고학력자일수록 

직업선택의 폭은 넓긴하지만, 

대부분은 배치가 되는게 일반적이다. 

 

직장을 안다녀도 되지만, 

식량배급대상과 국가공급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배급제가 무너진

90년대 이후에는 

장사도 하거나 국경지대를 

왕래하며 일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중학교의 경우, 

'시·군 인민위원회 노동과'에서 

직장으로의 배치를 담당하고, 

대학졸업자는 

'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의 조정을 받아

직장에 배치된다. 

 

법에서 정해진

노동시간은 하루에 8시간으로, 

정년은 남자의 경우 60세, 

여자의 경우 55세이다. 

 

노동시간 중간에 

생활총화나 여러가지 학습시간이 있다. 

 

일부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이 업무강도가 더 심할 것같다고 하지만, 

업무강도는 남한이 더 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어, 생각하는 만큼 노동강도가 높진 않을 수 

있다고 한다. 

 

 

5. 대중동원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경제건설이나 집단적 혁신 및 

사상개조운동을 통해 

전국가차원에서 대규모 인력동원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다. 

 

이 대중운동과 

문화혁명은 사상운동이기도 하지만, 

경제발전 수단으로 여겨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꽤 중요한 제도이다. 

 

북한에서는 

단기간에 경제적 성과를 달성하려는 목적

집단경쟁 운동을 통해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대중동원운동이 벌어진다. 

 

북한대중운동은 

'속도전'의 성격이라고 평가받는데,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군중노선'을

기반으로, 전사회적으로

빠르게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고강도의 

'돌파형 대중운동'을 벌이다가 

'일상형 대중운동'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다, 90년대에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며, 

'돌파형 대중운동'을 다시 부활시켰고

요즘은 대규모 동원운동은 

축소되는 추세다. 

 

북한의 대중운동은

오랫동안 자주 이루어지지 않다가 

작년 하반기에 '80일전투'를 

벌이면서 북한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요즘들어 축소된 이유에는 

대중동원운동이 경제발전에 

실질적 도움이 미미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될 수 있다. 

 

김일성 시기의 대중동원운동은 

상당히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되지만, 

김정일 시대의 

'150일 전투'나 바로 이어졌던 

'100일 전투'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 실패 사례로

분류된다. 

 

북한에서는 

대규모 동원이 없는 시기에도 

대중집회나 정치적인 궐기대회가 

거의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지도자의 신년사나 신년사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관, 지역 단위의 궐기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북한주민들에게는 

이것이 '강제참여'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정년 후에는, 

근속연수가 15년 이상인 경우, 

국가에 의해 생활비나 식량 배급이 이어진다고 한다. 

 

'김일성훈장'이나, '로력영웅'이라는 칭호가 붙으면, 

그 액수는 더 많아진다. 

 

6. 북한의 장례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사망 시, 사망진단서를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발급받아 

동사무소에 제시해야한다. 

 

직장에서는 3~5일의 휴가를 

주며, 3일장을 치른다. 

 

남자는 검은 천을 팔에 두르고

여자는 머리에 흰 리본을 단다. 

 

장례절차는 

녹화사업소나 편의협동조합이

맡아준다고 한다. 

 

국가적 장례는 '국장'이나

'사회장'으로 치러지는데

여기에는 보통 고위관료의 사망이 

해당된다. 

 

국가에 대한 공로를 많이 쌓은 사람은

'열사릉'(우리의 현충원)에 묻힌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사후에도

국장으로 상당히 큰 규모로

장례가 치러졌다. 

 

보통 주민들은 

매장을 선호하였는데, 

매장을 너무 선호한 나머지 

매장지가 모자라서 

70년대부터는 화장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매장이 

성행하고 있다고한다. 

 

북한에서 

'인민'의 사망은 

공식기록에서의 삭제를 의미하며 , 

죽음에 이르러서야 

국가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 북한의 사회변화


(1) 시장 

90년대 경제위기로 

배급제가 무너진 북한에서는

이후에 시장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였고, 

2002년에는 시장을 합법화하였다.

 

처음의 시장은

'농민시장' 형태였다. 

협동농장의 농민들이 

개인텃밭이나 집에서 가꾼 채소, 

닭 등을 물물교환형태로 교류했다.

존재가치가 미미했지만, 

90년대 경제위기 이후에는

그 가치가 높아졌다. 

 

이후에 2002년에 

시장을 합법화하며 

종합시장의 이름으로

시장들이 공식개설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삶 전반이 

변화를 맞게 되었는데, 

경제생활이 확대되고, 사회질서도 변화되며,

주민들의 가치관마저 변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북한은

과거의 국가 공급망과 

시장이나, 슈퍼마켓, 편의점같은 새로운 형태의

유통공간이 혼재되어있다. 

 

(2) 집단주의의 약화, 개인주의의 강화

개인주의가 강화되며 

비사회주의적 현상이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NGO단체나

무역활동은 남한이나 외국의 노래, 

비디오, 책 등이 유포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사회적 법이나 제도, 문화에서도 

변화를 맞게 된다. 

 

법적규정으로는

거주, 이동의 자유가 생기게 되었으며, 

컴퓨터 범죄등에 대한 조항을 신설하는 등

정보의 이동과 확산을 촉진시켰다. 

 

또한, 디지털문화가 확산되고,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 

휴대폰이 보급되며 

의사소통 양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3) 지역간, 세대간, 계층 간 격차 확대

북한에서는 

소득격차나 시장참여에서의 차이, 

불법소득 창출, 정치권력에 의한 

소득 창출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북한주민들의

사회문화적인 개인적 가치관이 

변하고 있지만, 

정치구조의 변혁으로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강력한 통제도 그 이유지만, 

정치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대안담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안담론을 발전시킬

지식인-개혁엘리트들과 주민들의 결합도 

이어지고 있지 않다. 

 

물론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로부터의 변화'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수용하게 되어서

충분히 사회변혁, 정치적 변혁까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제도에서 봤듯이 

김씨세습이라는 권력정치구조를

미화하는 교육을 

유치원 때부터 받기 때문에, 

대대적인 사회적 변혁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의 북한 이미지는

호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러한 점도 변혁으로 이어지는 길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북한의 위기와 선군

Ⅲ. 조선노동당의 당군

Ⅳ. 맺음말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승계과정에서

군권의 이양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이전,

김정일은 이미 1970년대부터 수십 년간

조선노동당의 조직지도부를 통하여

당ㆍ정ㆍ군을 통제해 왔다

마지막 권력승계는

공식적인 군권장악으로 이루어졌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물려받았고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임명되었으며,

1993년 국방위원장에 취임하였다

 

2008년 김정일의 건강악화설 이후

2010년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됨으로써,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공표하였다

북한의 권력승계에서

군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권력승계는 신속히 진행되었으며,

김정은은 정권을 장악한 후

‘은하 3호(대포동-3)’ 발사 성공,

3차 핵실험 강행 등

핵 무력을 이용한 리더십을 과시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어떻게 군권이

북한에서 권력을 상징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조선노동당의 당군인 조선인민군의

현황 및 조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의 기원과 성장 과정,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를

차례로 진행할 예정이다


Ⅱ. 북한의 위기와 선군

 

1990년대 소련의 몰락으로 인한

사회주의 경제협력의 약화는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93년 연장한 제3차 7개년계획도

달성하지 못하였다

 

경제침체는 1990년대 가속화되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북한은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체계적 비전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8차 당대회에서 ‘자력갱생 노선’을

고수할 뿐이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당의 배급체계는 흔들렸고,

배급을 바탕으로

주민을 통제ㆍ지도하던 체제도 붕괴되었다

1995~1998년 사이에는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지 않아

국가예산조차 공표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처럼 탈냉전기

북한의 당ㆍ정은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군과 보안기관 등

통제기구는 도리어 강화되었다

 

김정일은 1998년

‘사회주의 강성대국론’을 내세워

국가안보 분야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내외적인 생존전략의 핵심은

군사력의 활용을 포함한

군사적 방법이었다

 

1990년대 전후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직면한

북한 지배집단은 체제안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군에 대한 절대적 통제를

무엇보다 중시하게 되었다

국내 정치적ㆍ경제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국가와 체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력을

정권 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이 비군사적인 영역에서도

사회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군사선행’, ‘군사중시’ 등의 용어를 내세우며

새로운 통치담론을 제기하였다

 

군을 경제사업과 사회통제에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불가피한 국정운영방식은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선군정치는 《노동신문》에 의하여

가장 발전된 정치형태라고 선전되었고,

김정일의 통치방식으로 부각되었다

 

선군정치 :: [ 주체사상 ③ ] 김정일의 선군정치론과 강성대국론 :: 북한헤럴드 (tistory.com)

 

이렇듯 선군정치는 위기에 직면한

북한의 생존전략이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Ⅲ. 조선노동당의 당군

 

북한의 국방위원회는 1972년부터 2016년까지

운영되었던 기관으로,

김정은이 국무위원회를 신설하며 폐지되었다

따라서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인

국방위원장의 역할도 국무위원장이 대체하였다

 

조선인민군이 가진 당군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국방위원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국방지도기관’으로,

북한 헌법에 의하면

국방위원장은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으로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ㆍ통솔한다고 되어있다

 

국방위원회 소속인

인민무력부, 인민보안부, 국가안전보위부,

제2경제위원회 등은

내각 산하의 일반 경제ㆍ행정 부서에 비하여

정책결정과 자원배분에서 우선권을 가졌다

 

당조직의 관료화와

김일성ㆍ김정일에 의한 사인화로 인하여

당중앙위, 당중앙군사위, 정치국 등

협의ㆍ의결기구는 유명무실해졌다

이 상황에서 집행기구인 중앙위 비서국의

실무 부서들이 실권을 갖게 되었다

 

비서국의 군사부가 군사 업무에 대한

지도감독을 담당하였고,

조직지도부가 군의 정치 사업에 대한

당적 지도를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기계공업부와 선전선동부도

부문별로 사업을 지도ㆍ감독하였다

 

특히 인민군 당위원회의

집행기관인 총정치국에 대한

당중앙위의 지도와 통제는

비서국의 부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총정치국을 전담하는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13과는

북한군 지휘관과 정치 간부들의

당 생활을 지도ㆍ통제하며,

간부4과가 정치군관들의 인사를 결정하였다

 

당중앙위보다 그 집행기구인

비서국에 실권이 있었듯,

군당위원회보다 그 집행기구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산하 각급 당위원회의 정치부가 실권을 가졌다

 

2010년 개정된 당규약은 군대 내 당조직인

총정치국의 위상을

중앙당 부서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켜

군대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당의 사인화에 따라 ‘당군’이

최고지도자 ‘사병’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총정치국의 지위를 강화하며

군의 당적 통제에 관여하였으며,

‘당중앙’이라는 신분으로

당ㆍ정ㆍ군에 대한 지배력을 키웠다

 

특히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공표된 이후 수십년간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통하여

군을 장악하여 왔다

북한체제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 중 하나인

조직지도부는 부장 없이

제1부부장들만 있는

김정일의 직할 조직이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군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된 이후였다

이후 1991년 제6기 19차 당중앙위 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하여

600여 명의 장령급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고,

25일 창군기념행사에서는 직접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열병보고를 받아

위세를 떨치었다

 

또한 1992년 개정 헌법에서는

국방위원회의 지위와 권한을 격상시키고

국방위원장을 주석과 분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국방위원장에 선출됨으로써

김일성 생존 당시에도

최고군통수권자로서의 지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및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당ㆍ정ㆍ군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현재 김정은 역시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중요 군사정책과 군 간부 인사권을 행사한다

또한 ‘국무위원장’으로

국가의 무력기구인 국방성(舊 인민무력부),

사회안전성(舊 인민보안부),

국가보위성(舊 국가안전보위부)를 지도하며,

‘최고사령관’으로 군대를 직접

지휘ㆍ지도하고 있다


Ⅳ. 조선인민군의 조직

 

북한은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방성(舊 인민무력부)이

국방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실제로 인민군 창건 이래

역대 민족보위상과 인민무력부장이

군의 최선임자였다

 

1978년 말 총정치국장 오진우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래

총참모부와 총정치국으로 많은 권한이 옮겨갔다

오진우는 거의 20년간

무력부장 자리(1976~1995)에 있었으나,

그의 지위가 공고하였던 것은

김일성ㆍ김정일의 신임에 힘입어

상당 기간 총정치국장을 겸임하였기 때문이다

 

오진우 사망 이후 인민무력부(現 국방성)는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형식상의 군정기관으로 바뀌었다

군 간부의 인사문제 등 주요한 군정권은

정치사업의 명목으로 총정치국이 행사하였다

 

김정일 체제 하에서는

국방위원회 및 각종 주석단 서열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보다 서열이 높았다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에서도

총정치국장을 맡은 최룡해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부 안의 동요가 있을 수 있으나

당군에 대한 통제가 철저하게 관철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편 국방위원회는 명목상의

‘최고국방지도기관’으로서,

당중앙위ㆍ당중앙군사위의 당적 지도를 받았다

2004년 김정일이 지시한 <전시사업세칙>에도

당중앙군사위가 항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내각, 인민보안부 순으로 임무를 규정하였다

 

2010년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하여

당중앙군사위가 재정비되었고,

특히 김정은은 국방위원회가 아니라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후계자임이 공표되었다

이는 새로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를 통하여

국방위원회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할 것임을 의미하였다

 

군령권은

전시에는 최고사령부가

인민군, 인민경비대, 예비병력 등 기타 무장력을

모두 지휘하나,

평시에는 총참모부가 군령기관으로서

전군의 군사 업무를 관장한다

 

인민군은 소련의 전통을 받아들여

육ㆍ해ㆍ공 통합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총참모부는 산하의 작전국ㆍ정찰국ㆍ

전투훈련국 등 수십 개 전문 부서를 통하여

전후방군단, 평양방어사령부,

해군사령부, 공군사령부 등에 군령권을 행사한다

 

총참모부가 막강한 군령권을 지닌 듯 보이나,

주요 군정 기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

총정치국이 군령권에도 개입한다

1969년 이래 각급 부대의 작전명령서에

군사지휘관들과 함께

정치위원이 서명함으로써 효력을 갖게 되는

군의 이원적 지휘체계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68년 군수뇌부의

대규모 숙청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군벌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군을 막강한 세력으로 키워

당의 통제 아래 두고,

최고지도자 자신에 대한 충성을

담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철저한

‘분할통치(divine and rule)’ 방식을 구사하였다

 

인민군은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총참모부가

각각 국방위원회와 최고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삼중 통제체제를 갖게 되었다

 

나아가 2000년대에는

방첩ㆍ비밀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보위사령부(現 보위국)도 권한이 커졌다

인민군은 보위사령부는 물론

외부의 국가안전보위부(現 국가보위성)와

인민보안성(現 사회안정성)에 의한

공개ㆍ비공개적 삼중 감시를 받았다

 

과거 인민무력부가 기능적으로 나뉘었듯,

총참모부 역시 분할되어 있다

전시에 가동하여야 할 최고사령부가

평시에도 존재하며,

최고사령관이 총참모부 작전국에

직접 명령을 내기리도 한다

김정일 때에는 작전국장이

현지지도를 빈번하게 수행하였다

 

총참모부가 관할하는 육ㆍ해ㆍ공

작전부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편찬한

『2020 국방백서』에 따르면

인민군 지상군은 10개의 정규 군단,

기계화군단 2개, 제91수도방어군단,

평양고사포사령부,

특수부대를 관장하는 11군단,

기갑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은

육군 100만, 해군 6만, 공군 11만 등

총 128만 명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병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은 의무제 17세 입대를 제도화하였다

 

1990년대부터 사병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되었고,

제대자들은 한국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교도대에 편입된다

 

예비 병력은 준군사력

(사회안전성, 속도전청년돌격대 등) 40만,

교도대 60만 외에

노농적위군 570만,

붉은청년근위대 100만 등이 지역별로 편성되어

762만의 동원 체제를 구성한다

이 중 교도대와 일부 근위대 인원이

유사시 현역병으로 동원될 가능성이 있다

 

직업군인의 경우,

인민군 수뇌부의 고령화 현상

현저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 김정일은

군의 사기ㆍ충성심을 진작하고

군 원로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원수ㆍ차수 등 여러 차례의 대규모

계급승진을 단행하였다

 

선당정치를 표방하는 김정은은

집권 초 군수뇌부를 자주 숙청하고

군 간부의 상당수를 세대교체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2020년 리병철과 박정철에게

원수 칭호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북한의 군권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조선인민군의 조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본

북한 당국은 생존전략으로

군사력을 내세우고,

이를 정권 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었다

이에 따라 군은 사회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강력한 힘이 주어졌다

 

김일성ㆍ김정일 1인 집권체제로 변모하며,

당군이었던 조선인민군은

최고지도자의 사병으로 전락하였다

김정일은 군을 체계적으로 장악하였고,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이미 군권 승계를 마무리하였다

김정은 또한 국무위원장과 최고사령관을 겸하며

군대를 통솔하고 있다

 

한편 국방성은 산하 기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군정기관으로 바뀌었다

군정권은 총정치국이 행사하고,

군령권은 총참모부가 행사하게 되었다

 

총정치국장이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보다

서열이 높다

그렇기에 총참모부가 가진 군령권에

총정치국이 개입하여

이원적 지휘체계가 수립되었다

 

총참모부가 육해공 작전부대를 관할하는데,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복무 기간이 늘어났다

직업군인의 경우 고령화 현상이 현저하나,

김정은은 세대교체를 단행하고 있다


【 참고문헌 】

 

국방부. 『2020 국방백서』. 국방부, 2020.

임병선, (2020). “북 연말까지 ‘80일 전투’ 전개하기로, 리병철ㆍ박정철에게 원수 칭호”, 서울신문, 10월 6일.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87-200.

통일부 통일교육원. 『북한 지식 사전』. 통일부, 2016.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국방위원회’ (접속일: 2021년 3월 13일).

北, 권력 3대 세습체제 비교 (출처: 헤럴드경제)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며 북한의 세 번째 지도자인 김정은의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선대(先代)인 김정일의 선군정치, 직할통치와는 다르게 

김정은 시대의 특징으로는 선당정치, 경제·핵 병진노선, 노동당 정치국회의 정상화 등이 꼽힌다.

이와 같은 김정은 시대의 특징을 2010년대 초, 북한 권력구조 변화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김정은 정권 '제한적 단일지배체계'로 출범

 

 김정은의 후계과정이 짧았던 만큼, 김정은 정권은 공고한 권력이 형성되기 전에 출발하였다. 북한은 김정일이 사망한 날부터 김정은이 유일적 영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으나, 현실은 권력의 집중도 면에서 유일지배체계, 단일지배체계보다 낮은 수준인 '제한적 단일지배체계'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주요 국가정책을 김정은 혼자 최종 결정하기보다는 그를 후견·지지하는 세력과 또는 각 진영의 대표들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공고한 권력 부재는 최고지도자-핵심 엘리트 간의 관계에서도 특징되어 나타났다.

김정일 정권과 김정은 정권의 최고지도자-핵심 엘리트 간 수직적 지배체계의 모습에서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김정일 정권에서는 당제도화를 약화시키고 ··군에 대한 직할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지도자와 핵심 엘리트 간 경계가 명확하고 최고지도자가 핵심 엘리트 위에 군림하였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초기에는 군림보다는 핵심 엘리트들이 최고지도자를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는 최고지도자와 엘리트간의 경계가 불명확함과 더불어 관계에서도 일방적 지시에서 상호의존 형태로 변화한 것을 의미하였다.

직할통치가 약화되며 당제도화가 일정 부분 회복되었고, 선군정치 아래에서 제한적 간헐적으로 실시되었던 내각책임제가 강화됨으로써 당··군의 수평적 역할 분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와 7월 리영호 숙청을 지나면서 김정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 당··군의 최고직책을 다 가지게 되었으며, 비대해진 군의 역할을 재설정하기 위해 군부 서열 1위인 총정치국장에 민간 당료 출신인 최룡해를 임명함으로써 리영호와 같은 야전군인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7월 리영호의 숙청은 북한 핵심엘리트 구성이 변화된 것임을 시사하였다.

 

김정일의 지도하에서 군부가 중심세력이었던 것에 반해, 김정은의 측근은 족벌과 공안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4년 동안, 군 지휘부와 공안기관 책임자들이 전원 교체되었으며 이러한 잦은 교체 과정을 통해 김정은의 권위와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민간 당료 출신 최룡해의 총정치국장 임명함으로써 군에 대한 당적통제가 강화되었으며, 이는 야전군인 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중심세력의 교체는 정권 초기 제한적 단일지배체제가 점차 단일지배체제로 이행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고모부 장성택 숙청

2013년 12월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숙청된다.

그는 김정일이 후계작업의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으로서, 김정일 사후 김정은 후계체제 출범에 절대적 기여를 한 바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가 그를 숙청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권력 체제에서나 2인자의 처지는 곤란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체제의 경우, 그리고 권력승계에 대한 공개적인 규칙이 결여된 체제인 경우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북한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며, 따라서 후계작업을 통해 강화된 장성택의 권력은 최고지도자에게 있어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성택 숙청의 직접적 계기로 외화벌이 문제를 둘러싼 군부와의 갈등, 김정은의 자금관리 기구인 '39호실' 지휘권 갈등 등이 거론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숙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성택 숙청 사건은 당제도화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정은은 당을 통한 통치, 즉 당의 제도화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를 위해 정권 출범 이후로 당대회, 전원회의, 정치국 회의를 수차례 개최하였다. 그는 집권 이후 주요 인물들의 숙청에서도 이를 활용하였는데, 2012년 7월 당 정치국회의에서는 리영호를  2013년 12월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해임함으로써 당기관의 정치적 위상을 증대시켰다. 

 

 

 

□ 김정은 시대의 권력구조 특징 정리

- '수령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정치'에서 '정치 시스템에 의한 정치'로의 전환 추진

- 김정일 시대에 약화된 당을 북한정치의 중심으로 복귀

- 경제발전과 체제 보위를 위해 내각과 군대의 독자적 역할을 보장

북한 권력구조의 변화도,「김정은 정권의 수령제와 당,정,군 관계」,김갑식(2014) 발췌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2장 '권력구조와 엘리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김갑식. (2014). 김정은 정권의 수령제와 당,정,군 관계. 한국과국제정치(KWP), 30(1), 29-64.

한승동. (2016). "장성택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나?", 한겨례, 2월 4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사회평론, 2013.

※ 해당 게시물은 현대북한학강의』 제 4장. 선군경제, 시장 그리고 개혁을 참조하여 쓴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최근 김정은은 

지난 달(1월) 수립된 새로운 경제계획이

보완되지 않았다며 

경제부장을 경질시키고 

새로운 후임을 세웠다. 

 

농업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고, 

전력과 건설부문은 목표를 낮게 잡아

폐단들이 생겼다며 질책하고, 

김두일 경제부장을 경질시켰다.

 

새로운 후임에는 

'예산통'이라 불리는  

오수용을 임명했다. 

 

이를 통해, 북한의 경제관리가 

목표만큼 잘 되고 있지 않아

경제난에서 아직 허덕이고 있는 것

알 수 있다. 

 

도대체

북한은 경제관리체계를 

어떻게 하고 있길래, 

이렇게 경제난에서 벗어나질 못할까? 

 

오늘 포스팅에서는, 

북한의 전통적인 경제관리체계부터 

김정은 집권 후의 

관리체계까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 북한의 전통적 관리체계 ]


전통적인 경제관리체제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정치사업 우선의 원칙,

둘째, 집체적 지도와 유일적 지도의 배합

셋째,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넷째, 독립채산제의 원칙

 

첫번째 정치사업 우선의 원칙

당의 노선이나 정책을 위주로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것으로, 

계획화 사업, 기술지도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 조직 사업'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가적으로, 이 원칙에서는 

근로자들의 생산적 열의와

적극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근로자에 대해 정치사상적 자극으로 

동기부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두번째 '집체적 지도와 유일적 지도의 배합'의 원칙은 

당 위원회의 집체적인 지도와

행정지휘관의 유일적인 지휘를 합친

것을 의미한다. 

 

당위원회는 각 경제단위의

최고기관으로 군림하고, 

해당 조직의 경제사업의 방향과

방도를 집체적인 토의로 결정하고,

그것이 잘 집행되도록 

지도와 통제를 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세번째 '계획의 일원화·세부화' 의 원칙에서

'계획의 일원화'란,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계획화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계획의 세부화'란, 

모든 경제부문들과 기업소들의 

경영활동, 경제계획을 세부화하여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번째 '독립채산제의 원칙'에서

'독립채산제'를 북한에서는 

'국가의 지도 밑에서 국영공장 및

기업소가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경영활동을 하며, 자체수입으로

지출을 보장하고 

국가에 이익을 주는 기업관리방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제도는, 당국의 재정지출을 

최소화하고, 예산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60년대부터 도입되었으며, 

1998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할 때, 

이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러한 전통적 경제관리 원칙들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계기로

상당히 변화했다. 

 

평균주의를 철폐하고, 인센티브제를 도입했으며, 

지배인의 권한 강화 등은 

북한이 전통적으로 강조하는 집체적 지도보다는

독립채산제와 현장에서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2005년경부터

후퇴하기 시작하여, 2008년경부터는

다시 중앙집권적 지도를 다시 강화했고, 

2009년 '150일 전투'(2009년 4~9월)과 

같은 '속도전식 대중동원체제'로 회귀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은 부분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경제관리 시범조치를 시도하며 

'마식령 속도전'(2013년 6월)과 같은

대중동원방식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라는 조치를

시범단계를 거쳐 

마침내 2014년 

'5.30 담화'를 계기로 

전면 시행하게 되었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란, 

생산현장의 자율성을 높여서, 

계획 수립부터 생산,

그리고 생산품 및 수익의 처분에 대해

기업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조치이다.

 

2016년 5월에 7차 당대회에서 

'우리식경제관리방법' 하위 범주로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공식화하였고, 

2019년 4월에 개정한 사회주의 헌법에

전통적 경제관리 방식인 

'대안의 사업체계'를 삭제하고

'사회주의기업관리책임관리제를 명시했다.

 

[북한 경제의 부문별 특성과 변화 양상]


북한 경제는 

이전 포스팅에서 본 바와 같이, 국가에 의해 수립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계획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한다. 

 

북한이 전통적인

공업과 농업체계를 운영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공업의 운영원칙은

앞서 말했던 

2019년 헌법 개정 시 

삭제된 항목인 

'대안의 사업체계' 하에 

이루어졌었다. 

 

또한 농업은, 

'새로운 농업지도 체계'라는 원칙 하에

운영되었다. 

 

이 모든 부문은 

'계획의 일원화·세부화' 원칙에 

의거하여 관리되었다. 

 

1. 공업 : '대안의 사업체계'

'대안의 사업체계'란,

김일성이 1961년 12월,

남포시 대안 구역의 

대안전기공장을 방문하여 

경영시스템을 수립한 데서 비롯했다. 

 

당시 상황이 직면한 문제점은

'공장관리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이었다.

 

국가에서 파견하는

전문경영인 위주로 하자라는

의견과 

노동자를 대표하는 

혁명적 열의에 충만한

당비서를 관리자로 

추대하자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다른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유일관리제로, 

국가에서 파견한 전문경영인

공장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중국은 당위원회를 강조하여 

노동자를 대표하는 당비서가 

관리하도록 하였었다. 

 

이에 김일성은, 

당위원회 집체적 지도라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는 

당비서, 지배인,

순수공장노동자의 대표인 기사장이 

세 사람이 동시에 의사결정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중앙 국가기구에서 파견된

지배인(전문경영인)

중앙당에서 파견된 당비서에게 

전권을 주지않고 

현장 노동기술자의 대표 격인

기사장까지 동시에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대안의 사업체계'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및 관리책임 하에서

모든 생산활동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공장 당위원회는 당간부, 행정간부, 지배인,

기사장, 기술자, 근로자 등을 포함하는 집단이다.

 

둘째로, 계획 작성과, 생산 및 기술지도사업은

기사장이 맡고, 

자재공급, 후방공급사업 등

공장관리 전반에 관한 

행정경제활동은 

지배인의 지도 하에 통일적으로

수행한다. 

 

셋째, 중앙집권적인 자재공급체계로서, 

각 부 관리국, 공장 및 기업소, 

직장, 생산현장 순으로

지도한다. 

 

넷째, 기업소는 종합적 후방공급체계로서

기능하고, 근로자의 후생을

총체적으로 책임진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당 우위 체제라는 

사회주의 특성 때문에

당비서가 주도하는 당위원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에, 1980~90년대에,

김정일은 

당비서의 역할을 반급 정도

낮추라는 지시를 내리며, 

기존의 김일성이 강조했던

지배인-당비서-기사장의 

집체적 의사결정을 

강조하였다. 

 

1985년 7월에는, 

연합기업소 조직형태를 

전면 도입하였다.

 

연합기업소란, 

중앙계획기관의 지도 하에 

직접 계획을 세우고 

생산하는

계획, 생산, 집행의 단위

말한다. 

 

모체기업을 중심으로 해서 

일정 지역 내에서

생산에 밀접하게 연관이 된

기업소 및 공장을 편성하여

조직하는데, 

동일한 부문의 기업소와 

보조부문의 공장이나 기업소를 

함께 구성해놓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 경영 시스템 하에서는

당, 내각, 현장 간의 

역할만 조정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시장 운영 방식이 도입되어, 

대안의 사업체계가 덜 강조되었고, 

지배인 주도의 자본주의적

분권화 방식이 허용되었다. 

 

또한, 당비서들의 역할이 최소화되며

기술과 효용 측면에서의 

우위성을 증대하려는 노력

기울였다. 

 

2002년 경제조치 때

이원적인 구조의 비효율성을 

완화하기 위해 

경영자율권을 확대하였고, 

 

아까 언급했듯이, 

2005년에 후퇴하기 시작해, 

2008년부터는 다시 국가의

통일적인 관리를 강조하다가 

2009년에 화폐 개혁 실패 후, 

시장에 대한 묵인을 지속했다. 

 

2012년부터는 

7.1조치와 유사한 형태로

자율성을 부분적으로 부여했다.

 

[7.1조치에 대한 설명 참조]

2021/02/26 - [북한의 정태/경제] - [북한의 경제]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제

 

[북한의 경제]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제

※ 해당 포스팅은 『현대북한학강의』 제4장. 선군경제, 그리고 시장개혁에서 나온 개념을 참고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북한의 여러 경제 담론 중에 단연 유명한 담론은 김정일 시대의 '선군경

thenorthkoreaherald.tistory.com

2. 농업: "새로운 농업지도체계"

'새로운 농업지도체계'에서

"새로운"의 뜻은 

중국과는 다른 식의 구상이라는 점과, 

공업체계와 다른 농업체계를 

구상하겠다는 뜻 모두를 내포한다. 

 

당시 중국은 

소위 '인민공사'라고 하는 

정-사 합일체의 농촌 자치조직을

운영다.  

도, 군에 하나의 인민공사를 두고 

협동농장, 지방공업농장, 주민 행정사업까지

모두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최근에

협동농장 형식의 '인민공사'는

1990년대에 폐지수순을 밟고

민병에서만 실천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이러한 중국과는 다르게 

농촌지역에서 행정조직과 

협동농장은 별개의 조직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출처: 북한정보포털 

이러한 이중 조직체계는

원칙과 행정을 담당하는 

도, 군 인민위원회와 

협동농장 농업을 담당하는

협동농장경영위원회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도, 군 인민위원회는 

도, 군 단위의 행정사업이나

지방 공업 공장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고,

도, 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농촌 경리 역할을 하며, 

농업 지도의 역할 또한 하였다. 

 

북한의 농업 관리조직은

국영 농·목장, 국영농기계작업소, 

국영관리관개소 등 국영농장과 

협동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협동 농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영농장은 

정부가 소유하고 경영하는 농장으로서

두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농사시험, 채종, 가축 및 가금사양, 

양잠, 묘목, 과수 등에 특화된 농장이며, 

다른 하나는 

군의 협동농장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규모 농장으로 개편한 

종합농장이 있는데 

이 종합농장은 

최근들어 과거의 협동농장 단위로

회귀하고 있다. 

 

국영농장이나 종합농장은 

임금을 지불하는 형태이고

협동농장은 

생산수단을 분배하는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 

 

북한이 이토록 강조하는 

'협동농장'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마르크스 주의에 따르면, 

잉여생산량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모순은 

사회계급의 차별화를 낳고, 

이것은 계급 투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없어져야 한다. 

 

따라서, 협동 농장은 

개인의 생산수단 보유를 금지하자는

공산주의의 원리에 입각하여

토지를 몰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다. 

 

'협동농장'체제 하에서는 

농지의 소유권을 

공용이나 국가로 두고, 

수익을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실제로는, 

협동농장에서 아무리 일해도

한끼 식량조차 확보를 못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한다. 

 

이에, 협동농장에 나오지 않고

상대적으로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는

약초를 캐서 팔거나, 

외화벌이기관이나 돈주들이 

주관하는 건설현장에 

간다고 한다. 

 

중국이랑 베트남의 경우,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농업개혁부터 시작했었는데, 

이때 처음 시행했던 것이

바로 '협동농장'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들 국가는

각각의 개인농장을 소유할 수 있게되어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북한도 협동농장을 없애기만 하면

식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다. 

 

 

[최근 경제관리체계의 변화]


김정은 집권 이후, 

여전히 국가 주도로 일부 경제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김일성, 김정일 대의

경제관리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최근에

김일성이 정식화했던 

'계획의 일원화·세부화'의 원칙에서 

'세부화'를 포기하는 변화를 보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부화'는 

계획을 최대한 세세하게 짜서

중앙에 보고하는 형태로, 

계획의 일체성과 구체성을 

지향하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가

역풍을 맞게되어 경제위기가 오고,

시장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시장 활용에 대한 재량권을 주기 위해

세부화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가 운영원리로서

계획의 유일성과 

통제·관리체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계획의 일원화'를 

강조 중이라고 한다. 

 

'독립채산제'에서도 

변화양상을 보였는데, 

1998년 사회주의 헌법에 

명문화 시킨 이후, 

2002년 7.1 조치를 통해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 

 

2003년 회계법,

2004년에 재정법을 제정하였고, 

기업경영의 최종목표는 

기존 목표였던 원가절감에서

순소득증대로 바뀌게 되었고, 

재정적 통제가 완화되었다. 

 

기업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국가납부 방식에 

정액 납부 방식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에 

시장이 너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게 되어 

2008년 경에는 

시장 통제 정책을 피면서 

'사회주의 노력경쟁'이라는 

대중동원운동까지 병행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대중동원운동은 지속되었는데 

최근 '80일 전투'도 그렇고, 

2013년에 '마식령 속도전' 또한 

대중동원운동의 일종이다. 

 

김정은은 

이와 더불어 

7차 당대회 때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의 하위 범주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공식화했고

마침내 2019년에 사회주의 헌법에 

'대안의 사업체계' 대신 

이 체제를 넣게 되었다. 

 

김정은은 

집권 후 대외협력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 시키기 위해 

필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광물자원개발권을 담보로

외자를 유치하는 방식에 

열의를 보였다. 

 

또한, 북-중협력과, 

남북협력에 의한 무역거래를 

적극 피력하며, 

자력갱생만 강조하던 것에서 

지역협력과 경제발전을 연계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후 

남북경제협력의 거점이던 

개성공단이 문을 닫게 되며, 

북-중 협력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대북제재와 코로나 사태로 

이러한 모든 교역이 

표면적으로는 어렵게 된 

상황이다.

 

김정은은

'경제-핵무력 병진 노선'을 선포하고,

경제 관리에 있어서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표방하며, 

2016년에는 

'국가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2021년 당대회에서 

이것 또한 실패했다는 발표를 하였다. 

 

8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국가발전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잘 되고 있지 않은지, 

최근 경제부장까지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북한 경제는

아직 폐쇄적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예측 불가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따르고 있지 않아

우리가 분석하여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삼위일체 불가능론'이 

북한 경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고 강조한다. 

 

'삼위일체 불가능론'이란 

민주주의, 안보, 시장경제가 

동시에 보장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때, 저가격, 고투자의 

내핍체제에 해당하는 

'스탈린 식 모형'을 경제원형으로

채택했었다.

하지만 이는 부족한 경제의 

만성화를 불러일으켰고 

비효율성도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90년대 경제 위기가 왔고, 

김정일은 이를 

'선군경제'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는 

2000년대에 북한 경제를

플러스 성장세로 돌려놓은 

원동력이 되긴 하였지만, 

2002년 7.1 조치나 

2012년의 부분적인 개혁 조치는 

중공업주의 때문에 벌어지는

체제적 부작용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7.1조치를 시행하긴 하였지만, 

곧 체제의 불안정이 걱정이 되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김정은 집권 후에도 

국가가 전체적인 경제 정책을 

계획한다는 기본 원칙은 

변하지는 않았지만, 

각 부문의 특성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도록

어느정도의 자율권을 

확대한 것은 

북한 경제 역사에서 

상당히 큰 변화이다. 

 

하지만, 전향적인 경제정책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김씨 세습이라는 

정치적 안정성을 포기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완전한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바로

'삼위일체 불가능론'에 입각한 것이며, 

북한 경제를 분석할 때에 

중요한 지표로 활용될 수 있다. 

 

북한의 체제적 특성과, 

경제 정책이 어떻게 

맞물려 가고 있는지 볼 때, 

이 '삼위일체 불가능론'을 

머리 깊숙이 새기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장달중. 현대북한학강의. 사회평론, 2013, pp.172-182.

북한정보포털. https://nkinfo.unikorea.go.kr/nkp/overview/nkOverview.do (검색일: 2021228)

집단농장’.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7%91%EB%8B%A8%EB%86%8D%EC%9E%A5(검색일: 202131)

정우남, (2019). “북한 협동농장 출근율 절반도 안돼 농사일에 큰 차질”, Liberty Korea Post 디지털신문, 53.

변창섭, (2015). “협동농장 완전 폐지하면 북 식량난 해결”, 자유아시아방송, 224.

KBS NEWS. (2021, Feb 12). 김정은 달라진 게 없다”...북한 경제부장 한 달 만에 전격 교체[video file].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xZ1EKdR5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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