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TETNS ::

Ⅰ. 머리말

Ⅱ. 김일성-김정일주의

Ⅲ. 김정일 애국주의

Ⅳ. 맺음말


북한에서 후계자는 수령이 창시한 혁명 사상을

계승ㆍ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정은은 선대수령인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선군사상을

동렬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김일성-김정일주의’로 규정하여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는

2012년 김정은 체제의 출범과 더불어 제시된

지도이념으로, 후계 구축기간이 짧아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김정은의 리더십 구축을 위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김정은은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하였고,

선군사상을 ‘김정일주의’로 격상시켜

이를 주체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림으로써

선대 수령의 사상을 고도로 추상화시켰다

 

이번 글에서는 현재 북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김정은의 통치 담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선대 사상을 심화ㆍ발전시킨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먼저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하위 담론인

‘김정일 애국주의’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이후 김정은 담론의 한계에 대하여 짚어보며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김일성-김정일주의

 

 

2012년 4월 11일

북한은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조선노동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채택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은은 김정일의 혁명 사상을

‘김정일주의’로 정식화하였다

김정일의 총대중시사상을

선군혁명사상, 선군정치이론으로 심화ㆍ발전시키고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김일성주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김일성-김정일주의

김정일이 정식화한 김일성주의에

김정일의 이론을 합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김정은은 또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이며

주체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혁명사상”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김정은이 ‘수령의 후계자’이자

새로운 수령으로서

주체사상에 대한 해석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Ⅲ. 김정일 애국주의

 

3대 세습의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고

김정은의 발전노선에

인민대중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하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를

제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김정일 애국주의’는 2012년 3월,

전략로켓사령부를 시찰한 김정은이

“김정일식 애국주의를 높이 발휘하는 데서

인민군대가 앞장설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4월 27일,

국토의 발전과 관련된 담화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표현하였다

 

국토의 관리 및 발전을 위하여

주민들에게 사회주의적 가치보다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동년 5월의 《노동신문》에서 본격적으로

김정일 애국주의 개념이 등장한다

사설은 대중들을 위한

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강조하며,

김정일의 ‘인민사랑의 정치’를

발전시켜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용어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처럼

일정한 이론적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정일 애국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김일성-김정일주의’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대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함으로써

대중동원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애국주의의 정당성은

현지지도 강행군 중에 사망한

‘김정일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성’에서 비롯된다

 

김정일이 ‘혁명가’이기 전에

‘애국자’였던 표현을 통하여

사회주의 이념이 주민들의 결속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가 체제 결속을 위하여

주민들의 강한 ‘애국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수령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숭고한 조국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3대 승계를 정당화하고

인민대중의 충성심을 동원한다

 

수령 중심의 애국관에 기초하여

수령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애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 강조로 연결되어

김정은 체제의 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한 정치적 하위 담론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 애국주의는

숭고한 인민관을 핵심으로 하여,

위민이천(爲民以天)’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를 후대 사랑과 미래 사랑으로

그 저변을 확장하였다

 

위민이천 :: 《노동신문》김정일 전 위원장과 관련된 기사 분석 :: 북한헤럴드 (tistory.com)

 

김정일 애국주의가 강조하는 인민관과 후대관은

미래 인민생활 향상을

최우선의 가치로 둘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선군이 아닌 경제우선과 인민우선의 노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공식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선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선의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하고,

김정은의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김정은은 경제발전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김정은식 실천이데올로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 체제는 김정일 애국주의에 이어

경제를 우선하는 선경(先經)노선

혹은 선민(先民)의 김정은식 발전전략을

뒷받침할 새로운 실천이데올로기의 제시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내세운 김정은은

혈통승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향후 이데올로기 해석권을 독점하였다

 

더불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

여기에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새로운 하위 담론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김정일 애국주의로 연결되었다

 

김일성-김정일주의는

공식적으로 표방된 지도사상일 뿐

오히려 김정은 체제의 정당화와 이데올로기적 동원은

그 하위 담론인 김정일 애국주의에 의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여,

김정은의 새로운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천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 체제는

선대와는 다른 노선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새로운 담론의 제시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되며,

주체사상과 관련된 연구를 마친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일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 65-92.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39-45.

통일부 통일교육원, 『북한 지식 사전』, 통일부, 2016, pp.135-138, 147-150.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김정일과 주체사상

Ⅲ. 하위 담론: 붉은기 철학

Ⅳ. 맺음말

 


 

주체사상은 북한의 전 영역에서 영향력을 파급시키며,

모든 수준의 지도지침으로 제시된 사상이다

그 기원은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두고 있으며,

김일성은 전후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주노선으로 주체사상을 등장시켰다

 

 

김일성이 등장시킨 주체는 김정일에 의해 발전됐는데,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알기 위해서

1982년에 발표된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북한에서

탁월한 주체사상 이론가로 평가됐다

 

주체사상의 기원과 변천과정 :: https://thenorthkoreaherald.tistory.com/52

 

1970년대를 거치며 체계적인 사상체계의 틀을 갖춘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자성을 더해

북한 유일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공고화된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정일이 제시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론과 강성대국론,

김정은의 ‘김일성ㆍ김정일주의’와 ‘김정일애국주의’를

차례로 살펴볼 예정이다

 


 

Ⅱ. 김정일과 주체사상

 

1982년 3월 31일 김일성 탄생 70주년 기념

전국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을 통해 주체사상에 대한

종합적 체계화를 시도했으며,

철학원리의 도입을 넘어

주체사상의 전면적 심화단계를 보여주려 했다

 

김정일은 논문에서 “주체사상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주체사상은 크게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원리, 지도적 원칙

3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원리란 사람중시의 철학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본성과 지위 및 역할을 규정한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하며

사람에 대한 철학적 견해를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김정일은 사회역사원리를 설명하며

“주체철학은 처음으로

자주성과 창조성이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이룬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인간에 대한 완벽한 해명을 주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주체를 인민대중으로 상정하는 것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높이는 주체로 규정한다

 

이는 자발적인 인민동원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며,

동시에 동원되는 대중은

당의 지도, 즉 수령의 영도를 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리적으로 지도적 원칙이 필요한 셈이다

 

마지막, 지도적 원칙을 통해

수령과 당의 영도 하에 인민대중의 자발적 동원이라는

방법론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상개조선행정치사업선행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사상개조를 위해 주체의 혁명관을 학습하고

조직생활과 실천생활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 중심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에 맞추었다

 

김정일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은

당과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심각하고 복잡한 혁명투쟁을

힘 있게 벌려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이룩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환치시켜버린 레닌주의와

당 독재를 수령 독재로 바꿔버린 스탈린주의의 논리에

‘사람’과 ‘인민대중’에 대한 예찬을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수령 독재를 정당화한다면,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후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관한 많은 저작을 발표했고,

북한의 매체는 김일성이 창시하고 발전시킨

주체사상을 김정일이 심화ㆍ발전시켰다고 선전했다

 

그러던 중 1985년 10권의 주체사상 총서가 발간됐다

제1권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에서는

“주체사상이 원래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김정일)의

혁명사상의 진수를 이루는 사상만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혁명사상 전반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이 같은 언급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의 사상’과

동일시하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으로 간주하게 되는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2권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위업, 수령의 혁명위업 계승에서

차지하는 수령의 후계자의 절대적 지위의 특징은

수령의 후계자가 수령의 사상과 위업을

완성하기 위한 사상, 이론, 전략전술을 제시하고,

그 실현에로 인민대중을 조직 동원하는 최고뇌수,

최고의 영도자이며 당과 인민대중을

수령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우는

단결의 중심이라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수령의 후계자도 수령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지위’를 누리는 것

주체사상이 보장하고 있으므로,

주체사상은 수령과 후계자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85년에 발간된 이 총서는

그간 행해진 주체사상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한 것이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여러 이론서들이 발간됐지만,

1980년대 중반에 새롭게 총서를 발간한 것은

주체사상에 대한 김정일의 저작을 포함해

주체사상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으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Ⅲ. 붉은기 철학

 

실천이데올로기로 출발했던 주체사상이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된 시점에

북한은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폐쇄적 자립노선, 수령의 과도한 유일체계,

비효율적 계획경제 등이 초래한 북한경제의 위기는

급기야 사회주의권 붕괴와 수령 사망이라는

당시 상황과 맞물리면서

1990년대에 북한체제 자체의 위기로 발전했다

 

새롭게 도래한 위기상황은 주민들에게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승리가 아니라

체제위기 극복을 정당화할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이에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된 주체사상 대신

다른 담론의 제시를 통해 ‘정당화’와 ‘동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대신했다

대표적으로 수령 사망 이후 위기의 심화 속에서 등장한

‘붉은기 철학’을 들 수 있다

 

‘붉은기’는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기에

불렸던 적기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항일 빨치산의 정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붉은기 철학은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에게 혁명동지들이 보여준

‘자력갱생ㆍ간고분투 정신’, ‘수령 결사옹위 정신’,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북한 주민들에게 ‘붉은기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당면한 어려운 상황을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인고의 정신 등으로 무장해

극복하도록 유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체제동요를 우려해 주민들에게

체제고수 신념을 고취시키는데 활용했다

 

특히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붉은기 기치 - 붉은기 철학 - 붉은기 사상’ 등으로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주장했다

 

북한은 붉은기 철학을 신념과 의리의 철학이자

수령결사옹위를 강조하는

일심단결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위기상황에서 버팀과 인내의

집단적 의지를 제공하는 정치담론이자

배신자ㆍ변절자에 대한 정치적 경고의 의미도 가진다

 


Ⅳ. 맺음말

 

북한을 이야기할 때 주체사상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체사상이 대내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체사상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대남 정책에 크게 이용되는 동시에

제3세계에서 북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상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주체사상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의 유일 사상체계로,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위준칙을 정해주는 도덕규범이기도 하다

 

이에 김정일은 여러 저작을 발표해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기존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창시와 해석권이

김일성에 의해 주도돼 왔으나,

1982년 발표된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계기로

김일성 1인 독점에서 벗어나 김정일로 이양됐다

 

이후 주체사상의 중요한 논문 대부분은

김정일에 의해 발표됐다

김정일의 주도 하에 주체사상의 유일성이 강조됨으로써

체제유지기능을 넘어서

김일성ㆍ김정일의 세습체제구축을 위한 역할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은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2014),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65-92.

도현자. “주체사상의 변화와 북한의 대외 정책”,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이용호. “북한 주체사상의 통치기능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9-26.

장명봉. “마르크스 레닌주의 포기하고 ‘주체사상’ 강화: 북한 신헌법의 내용평가”, 『통일한국』 제109권(1993), 평화문제연구소, pp.65-69.

장의관. “북한의 통치이념과 주체사상”, 2010, 현대사회연구소, pp.6-11.

정용길, “북한의 사상체계: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관계”, 『북한학연구』 제20권(1991),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pp.29-44.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북한의 붉은기사상’ (접속일: 2021년 2월 13일).

:: CONTENTS ::

Ⅰ. 머리말

Ⅱ. 이데올로기란?

Ⅲ.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

Ⅳ. 북한에의 적용(‘김일성주의’)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북한의 내부여건 중 무엇이 북한의 행위를

이해하는 단서일지를 고려한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스스로 생각과 고민을 규정하는

가치와 세계관일 것이다

세계관은 한국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으로,

그 핵심은 주체사상의 정확한 이해이다

 

이는 현재 북한에서 개인과 국가를 포함한

모든 수준의 지도지침으로 제시된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주민가치 및 생활영역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서 영향력을 파급시킨다

 

이번 글에서는 주체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에 앞서 기원, 형성 과정

및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이론적 체계,

김정일ㆍ김정은 시대의 정치 담론에 대한

글을 차례로 게재할 예정이다


Ⅱ. 이데올로기(Ideology)

 

이데올로기는 해당 체제의 정치경제적ㆍ

사회문화적 가치와 원리를 총체적으로 담아

사회 구성원에게 세계관을 형성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체제와 경제발전전략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성 속도가 느리다

주체사상이 폐쇄적 자립경제노선이 확정되고

갑산파 숙청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형성된 것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데올로기는

통일된 세계관을 부여함과 동시에

추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행동을

직접 동기화(motivation)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정당화(legitimization)’와

동원(mobilization)’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사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기능은

특히 사회주의 체제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사회주의가 무계급사회의 실현,

공산주의적 인간형 창출 등 보다 높은

목표지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전제로 셔만(Franz Schurmann)은

사회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관념과 행동의 연결체제가 간접적인가

혹은 직접적인가에 따라,

순수이데올로기’와 ‘실천이데올로기’로

구분하고 있다

 

순수이데올로기

‘개인에게 일관되고 의식적인 세계관을 제공하는 사고체계’로 정의되며,

실천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행동의

합리적 도구를 제공하는 사고체계’로 규정된다

 

이때 순수이데올로기 없는 실천이데올로기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실천이데올로기 없는

순수이데올로기는 그 세계관을

일관된 행동으로 전화시킬 수 없다

 

순수이데올로기가 표방하고

목표하는 가치실현을 위해

현실에서 요구되는 구체적인 정책방향과

행동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데올로기이다


Ⅲ.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

 

김일성시대 북한의 통치이념은

스탈린식 마르스크-레닌주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마르크스에게 역사 발전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사회계급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인식되었다

 

엥겔스는 이에 더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국가는 ‘불필요한 것’이 되며

‘사멸’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니콜라이 2세는 패전을 거듭했고

러시아 군중들이 봉기해

공화국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대중의 뜻을 무시했고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기치 아래 1917년 10월

노동자ㆍ병사의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혁명정부는 전쟁 중지와

지주 토지의 농민에의 무상 분배를 선언하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10월 혁명산업시설의 사회화(국유화)

농업 분야에서 생산수단의 개인 분배라는

방침을 가지고 수행되었다

농지 분배는 10여년 후에

‘사회주의적 소유(콜호스의 협동적 소유)’로

이행시켰다

 

소련이 식민지 및 피압박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무하였다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소멸’에 대한

엥겔스의 주장에는 반대하였다

 

1939년 3월 공산주의 시기에도

국가는 존속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스탈린은

국가의 단순한 유지가 아니라

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Ⅳ. 북한에의 적용(‘김일성주의’)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였다

 

해방 직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 앞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노골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

세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이유로 소련군정 사령부는

북한에서 좌파세력의 통합과

통일전선 형성을 추진하였다

 

1946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처럼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전후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주체 확립과 자주노선으로

주체사상을 등장시켰다

 

1950년대 김일성은 사상에서

‘주체의 확립’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사상의 토대를 형성하였고,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순수이데올로기를 실천하면서

북한식 실천이데올로기가 ‘주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개인숭배,

당의 집단지도체제 폐기, 무자비한 숙청 등의

‘오류’를 범했다는 이유로

흐루시초프에 의해 격화되었다

 

이 시기 ‘주체’는

탈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는

소련파에 대한 견제이자

외부원조 없는 독립적인 경제건설의 의지 표명이었다

 

그는 ‘주체사상’을 내세워

당내 경쟁적 정치세력의 도태ㆍ제거를 통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개인에 의한 권력행사를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북한에서는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농업협동화 및 개인 상공업자들의

사회주의적 근로자들로의 ‘개조’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주민들에 대한 사상 교육을 시작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고 소개하는 데

주력해 온 북한이

‘창조적’ 적용을 시작한 데에는

김일성의 1955년 12월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연설의 ‘조선 혁명’은 곧 주체를 의미했으며,

이는 스탈린주의에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형태였다

이를 기점으로 ‘주체’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소련 블록 내 패권변화라는 외부환경과 맞물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공산체제의 구축이라는 내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왜 1955년 12월 28일을 기하여

주체의 확립을 주장하였는가?

스탈린 격화운동을 전개한 흐루시초프는

소련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1인 독재를 지양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수용해야 한다는 전개를 펼쳤다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김일성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창익을 중심으로

연안파의 몇몇 인물과 소련파 박창옥이

김일성의 해외방문기간 동안

소련식 집단 지도체제 수립을 모의했다

 

김일성은 소련파를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입지를 굳혀갔다

이 시기 소련에서는

스탈린식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국가론을 버리고

전인민적 국가론을 새로이 마련하였는데,

이 역시 김일성의 개인 독재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하였다

 

종파사건 이후 1960년대 중소분쟁 동안

김일성은 중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주체라는 실천이데올로기가

대외노선에도 확대 적용된 것이다

 

1967년 당내에서 갑산파가 숙청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사상은 곧 당 지도사상처럼 여겨졌다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격상을 시도한 것은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결정되고

유일사상 10대 원칙을 강조하면서,

김일성의 유일영도체계로서의

수령체제’가 완성되었다

 

수령체제를 확실히 하고

후계의 안정적 구축을 위하여

주체사상은 수령과 후계자의 독창적 사상으로

격상될 필요성이 있었다

 

1972년 김일성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이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달리,

1974년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우월한 사상이라고 강조하였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결국 노동당의 지도이념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삭제되고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만 규약에 명시되었다

 

주체사상은 철학적ㆍ사회역사적

ㆍ지도적 원칙을 가진 사상인 동시에

‘사상ㆍ이론ㆍ방법의 전일적 체계’로

규정된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주체사상의 기원이 된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으로의 적용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순수이데올로기

실제 북한의 현실에 적용하면서

‘주체사상’이라는 독자적인 방침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주체사상은 실천이데올로기로서

자리 잡아갔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침과

수단으로서의 실천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의 진리를 토대로 실천을 위한

구체적 원칙과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순수이데올로기로 격상되었다

 

즉 1955년부터 1966년까지는

정책 활동 각 분야의 실천원리로서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면,

1967년부터의 주체사상은

당의 유일사상으로 확립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당의 유일사상으로 확립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주체사상은 노동당의 유일사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 참고문헌 】

 

김근식. “김정은 시대의 ‘김일성-김정일주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추상화”. 『한국과 국제정치』 제30권 제1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6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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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북한 주체사상의 통치기능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9-26.

장명봉, “마르크스 레닌주의 포기하고 ‘주체사상’ 강화: 북한 신헌법의 내용평가”, 『통일한국』 제109권(1993), 평화문제연구소, pp.65-69.

장의관. “북한의 통치이념과 주체사상”, 2010, 현대사회연구소, pp.6-11.

정용길, “북한의 사상체계: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관계”, 『북한학연구』 제20권(1991),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pp.29-44.

 

1965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화하는 김일성. 출처: 통일뉴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1. 북한은 비합리적 행위자인가?

 

 

많은 경우 북한의 대외적 행보나 행태를 묘사할 때 '벼랑끝 외교', '곡예 외교', '롤러코스터 외교' 등의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는 한다.

 

참고로 '벼랑끝 외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상대에게 겁을 주거나 위기를 조성하는 외교 전략으로, 
냉전시기 미·소간 대립에서 양측이 사용했던 외교 전략에서 유래했다.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 행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불확실성, 불예측성, 그리고 비합리성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곡예 외교'는 곡예사가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듯이 외교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롤러코스터 외교'는 외교 당사자의 행태와 분위기가 롤러코스터의 기구와 같이 급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외교 행태를 위와 같이 비슷한 용어들로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북한의 행보가 불규칙적이면서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의 대외정책에서 유일하게 도출해낼 수 있는 하나의 예측 가능한 지점은 바로 북한의

'도발-대화(협상)-도발'로 이어지는 순환적 행보라는 것이다. 

즉, 도발적 행동과 유화적 제스처를 번갈아가며 취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느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대외정책의 유일한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6년부터 2018년 초까지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설전. 출처: 동아일보

불과 얼마 전까지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가 북한의 지도자보다 더 예측 불가한 사람이었으나...

 

이러한 북한 외교의 특징은 전 지구적으로 북한을 '비합리적 행위자'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으나 

북한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가 비합리적 행위자였다면 '어떻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유례없는 

3대 세습 정권이 70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라에 수많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 가족 세습을 시도했던 독재자들이 존재했으나 

북한과 같은 형태로 남아 있는 독재국가는 없다는 것을 염두했을 때, 되려 북한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왔다는 것이 더욱 그럴싸한 가정처럼 보인다.

 

그 어느 독재자 및 국가와 비교해도 가장 비합리적인 국가로 인식되는 북한이 가장 오래 존속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주요 독재자의 비극적인 말로. 오직 북한만이 독재 정권을 이어오고 있다. 출처: 타임

또한 미국 CIA는 2017년 북한의 김정은을 '이성적 행위자'로 판단하며 그 근거로 트럼프와의 설전이 한창일 때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다는 것과 중국의 19차 당 대회 및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기간에 도발을 자제한 것을 

제시했다. 이에 앞서 미 정보 당국자들은 김정은 집권 초인 2012년에도 김정은이 미국에 대한 위협 수위를 끌어올리다가

갑자기 도발을 중지했을 때 처음으로 '그를 '합리적 행위자'로 판단했다'라고 전했다. 

 

2012~2017년까지의 북한 미사일 도발 횟수. 출처:동아일보

따라서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에 있어서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외교정책 및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국가의 '생존'을 도모한다는 것과, '국익'을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북한의 행보를 면밀히 살펴볼 때에야 비로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예측 불가능한 북한의 행보에 미약한 예측이나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북한이 현재까지 추구하고 있는 대외정책·외교정책의 이념 및 기조를 파악하는 것은

향후 북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하며, 이에 따라 아래에서는 북한이 주창하는 대표적 

대외 및 외교 정책의 이념과 기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북한 외교정책의 이념과 기조 

 

조선로동당은 자주, 평화, 친선을 대외정책의 기본리념으로 하여 반제자주력량과 련대성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세계의 자주화와 평화를 위하여, 세계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한다.
조선로동당 규약(2016.5.9)

 

1) 자주·평화·친선 

 

북한은 '자주·평화·친선'을 북한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이자 외교활동의 원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주·평화·친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에 기초한 '자주·친선·평화'를

외교정책 이념이자 방향이라고 밝힌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시 1988년 9월 자주·평화·친선의 순서로 변경됐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북한 대외정책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한 헌법 17조에서는 

'자주, 평화, 친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정책의 기본리념이며 대외활동 원칙이다'라고 명시하여 

조선노동당 규약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주창하고 있다.

 

1988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조선노동당 6차 대회. 김일성과 김정일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통일뉴스

 

상술하였던 것처럼 당시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자주·평화·친선'의 대외정책 이념이

정식화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우리 당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대외활동에서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 협조관계를 발전시키며,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다. 

자주·친선·평화, 이것이 우리 당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 설정의 근저에는 그동안 조선노동당의 지도 이념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주체사상'이 

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노동당 6차 대회는 김정일이 이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등극했다는 것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대회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제기한 '자주·평화·친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우선 '자주'란 

"모든 대외정책을 우리나라의 실정과 우리 인민의 이익에 맞게 독자적으로 결정하며 자신의 판단과 주견에 따라 

외교활동을 벌려나가는 것", "국제관계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혁명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풀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북한은 "민족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역시

다른 나라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친선'에 관하여서는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친선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라며, 

그 대상으로 사회주의 국가, 제3세계 비동맹국가, 그리고 북한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아시아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지목하고 있다.

 

'평화'에 대해서는 "평화와 안전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전쟁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수호할 수 있다"며, 

군사동맹 해체, 해외주둔군 철수, 비핵지대 창성을 구체적인 과제로 제시하였다.

 

2) 국익외교와 혁명외교 

 

각 국가별로 추구하는 목표와 전략들은 상이할 수는 있으나 국가의 생존 및 번영이 공통적·핵심적 국가이익의 범주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북한과 같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경우에는 더더욱 생존의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북한의 외교가 '생존'이라는 국익을 추구하는 성격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북한의 외교는 '분단국 외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과의 '정통성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외교정책 목표가 

설정되며, 이는 다시 궁극적으로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라는 국가목표에 귀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1980년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전국적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고 최종 목적으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 실현'라는

문구를 명시하면서 혁명외교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뒤의 최종 목적은 다시 2016년 개정되어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이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북한이 한반도 공산 통일의 전략을 폐기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혁명운동으로서의 외교'의 기조는 1964년 2월 27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4기 3차 전원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해 북한의 혁명역량뿐만 아니라 남한의 혁명역량과 국제혁명역량을 함께 길러야 한다며, 

이른바 '3대혁명역량 강화노선'을 채택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회의에서 김일성은 국제혁명역량 강화를 위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제3세계 인민들과의 단결, 그리고 중립국 신생독립국들과의 단결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의 일환으로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제10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 참석하였고,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1년 전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채택한 '3대혁명역량 강화노선'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김일성을 맞이하는 수카르노 대통령. 출처: VOA

반둥회의로도 불리는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개최된 회의로 당시 신생 독립국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이른바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으로 확장되면서

제3세계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NAM은 1961년 티토 대통령(유고슬라비아), 네루 수상(인도), 나세르 대통령(이집트),

수카르노 대통령(인도네시아), 엔크루마 대통령(가나) 등 5인의 주도로 창설되었으며, 신생 독립국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제3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 1990년대 이후에는 NAM의 존재감은 약화되었다. 

2010년 기준 NAM에는 118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3) 시계추외교와 갈등적 편승외교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권 국가의 두 강대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갈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펼쳤는데 이를 '시계추외교' 혹은 '갈등적 편승외교'로도 표현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갈등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등극한 흐루시초프가 1956년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함과 더불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을 공표하면서부터 심화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였고 반대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비판하면서 두 국가가 중심이 된

이러한 논쟁은 사회주의권 내에서 1989년 중·소 정상회담 전까지 지속되었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내정 개입, 그리고 이후 터져 나온 상술한 중소분쟁을 겪으면서

주체사상(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의 발현이 나타났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과 중국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비동맹 외교로 외연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 확장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 북한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소련과 중국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북한은 이 두 국가의 갈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를테면 북한은 1961년 중국과 소련에 각각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54년부터 63년까지는 균형을 이루면서 중국에 치우치는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신지도부의 등장과 함께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얼어붙게 되었다.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판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북한의

<<노동신문>>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하면서 자주적 외교의 노선을 천명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확보하자는 내용의 사설. 출처: 네이버 통일부 블로그

 

이렇듯 북한은 북소관계가 좋을 때는 교조주의(중국)에 대한 비판, 북중관계가 좋을 때는 수정주의(소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느 한쪽으로의 완전한 밀착은 경계하였다. 중소분쟁은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증가시켰고, 북한은 이를 기회로 활용하여 안보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중립성을 자주와 주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탈냉전이 이루어지면서 전과 같은 형태의 편승외교는 보이지 않았으나 북한은 얼마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개인적 친분을 과시하면서 미·중 전략 경쟁의 틈에서 일종의 시계추외교를 행사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바이든 신 행정부의 대북 관여정책이 본격화될 경우 북한의 자주외교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강건택.(2017). "미 정보당국, 김정은은 이성적 행위자라 판단", 연합뉴스, 12월 6일.

국가정보원. (2019). 「북한법령집. 상」. 

북한연구학회. 『북한의 통일외교』. 서울: 경인문화사, 2006.

애나 파이필드 저, 이기동 옮김. 『마지막 계승자』. 서울: 도서출판 프리뷰, 2019.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앞에서 목례하는 북한 주민들. 출처: 캐나다 한국일보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5장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에서 '신앙의 자유'를 언급하며 헌법에서 이를

보장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이는 제5장 66조와 68조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를테면 66조에

'17살이상의 모든 공민은 성별, 민족별, 직업, 거주기간, 재산과 지식정도, 당별,
정견, 신앙에 관계없이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거나 68조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것을 허용하는것으로 보장된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68조의 후반 조항에는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수 없다'라며

명목상 게재해 놓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항에서조차 단서를 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많은 탈북민들의 증언과 UN 및 국제 NGO의 북한 인권보고서, 김일성의 종교관, 전국적인 주체사상 신봉 및 헌법보다 위에 있는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 등을 통해 북한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사실상 없을 뿐만 아니라 박해의 대상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번 포스팅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자국 내 종교 현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기독교

 

(1). 조선그리스도교연맹

 

평양에 위치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본부 청사. 출처: 통일뉴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기독교연맹'을 모체로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창립 후 활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1974년 '조선기독교연맹'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1999년 다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북한의 종교관은 김일성이 “종교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그것은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며, 

그로 인해 1960년대에는 종교 자체가 아예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남북대화를 계기로 북한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하던 이른바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등의 활동을

재개시켰고, 1980년대에 한국의 종교 단체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이들을

통일전선으로 포섭하기 위한 교류 확대를 목적으로 종교 시설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1988년에는 봉수교회가 건립되었고, 1992년에는 칠골교회를 신축하게 되었다. 또한 198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종교학과를 개설하였고, 2000년에는 평양신학원을 개원하여 목회자 양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서방의 종교 단체와의 교류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북한지역에서 종교행사들을 개최하면서

북한이 필요한 물자나 설비 등을 지원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평양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봉수교회. 출처: 오마이뉴스

 

평양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칠골교회. 출처: 오마이뉴스

 

평양신학원. 출처: 통일뉴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중앙위원회에 위원장 및 부위원장, 서기장, 사무위원 등의 직책을 두고 있으며, 산하 부서로

국제부, 조직부, 종교부, 평양시위원회 등이 조직되어 있다. 현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위원장은 강명철이다.  강명철 위원장은 

현재 최고인민회의 14기 대의원상임위원으로의 직도 겸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종교 단체가 정부의

관변 단체일 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강명철 위원장. 출처: 노컷뉴스

참고로 강명철과 김정은은 친척지간인데, 아래의 표를 보면 그 관계를 알 수 있다. 

 

출처: 국민일보

잘 알려진 것처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반공주의자였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어머니의 이름인 '반석' 자체가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서 따온 것이며,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은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초대 위원장인

강양욱 목사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이며, 그 아들 강영섭과 손자 강명철이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위원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기반에서 자란 김일성 및 그 일가의 기독교 박해 행보는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북한에서는 평양에 위치한 두 곳의 교회 이외에 500여 개의 가정교회, 교역자 300여 명과 신도 1만 3천여 명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상당수의 탈북민의 증언과 북한으로 관광을 간 외국인 기독교인 등에 의해 실제 일상생활에서 

북한 주민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북한은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에 더욱 경계를 하며 수위 높은 

탄압을 자행하고 있으며,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북한의 지하교회 신도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조선카톨릭협회 

 

북한 천주교의 공식 기구인 조선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는 1988년 6월 설립됐다. 처음에는 조선천주교인협회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었다가 1999년 6월 조선카톨릭협회로 개칭되었다. 2008년 기준으로 신자 4,000여 명에 사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상술하였듯이 신빙성이 낮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 유치하면서 축전 정치행사의 하나인 종교인 토론회와 교파별 종교의식을 

치를 장소 마련을 위해 1988년 10월 평양 선교구역 장충동에 성당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북한의 유일의 성당인 장충성당이다.

 

참고로 북한은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초청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장충성당. 출처: 카톨릭뉴스

신부와 수녀는 없고 신도대표 2명이 미사를 인도하고 있는데, 미사는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와 10시, 11시 3차례 있으며, 매번

60∼70명의 신도가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교 내용은 기독교 교리 해설보다는 주한미군 해설, 연방제 통일 실현 등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한 지지와 반한, 반미전선에 치중되고 있다.

현재 조선카톨릭협회의 위원장은 강지영으로, 일반적인 종교인이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최고인민회의 14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 조선적십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강지영 위원장. 출처: 통일뉴스

(3). 조선정교위원회

 

조선정교위원회는 북한의 종교 단체 중 가장 나중에 창설된 단체이다. 2002년 김정일이 러시아 극동 지역 하바롭스크를 찾아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하고부터 북한에도 러시아 정교 성당 건립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 북한에 조선정교위원회가

2003년 9월에 발족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러시아 정교회 종사자 양성을 위해 모스크바신학교에 4명의 사제 유학생을 보낸 바 있다.

2006년에는 평양에 '정백사원'을 건립하였다. 

 

발족 당시 위원장은 허일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정교 사제들과 환담하는 김정일. 출처: 통일뉴스

 

정백사원을 둘러 보는 김정일. 출처: SPN 서울평양뉴스

 

정백사원. 출처: 통일뉴스

 

2. 불교

 

(1). 조선불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은 1946년 12월 26일 결성된 '북조선불교도연맹'을 모체로 한 불교 단체이다. 여타 다른 종교 단체와 마찬가지로

1971년까지 활동이 거의 없다가 남북대화가 시작되는 1972년 현 명칭인 '조선불교도연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 해외동포 종교인들을 초청하여 이들과 종교인 회담 및 반한 종교인 집회를 갖는 등 통일전선전략에 치중하였고

북한 내 '조선종교인협의회' 등 대외용의 종교인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선불교도연맹 또한 이 기구의 가입 단체이자 

대남 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구성 단체이다. 조선불교도연맹은 남북 불교 접촉·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기 위한 대외선전용 

성격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불교도연맹은 중앙위원회와 지역 사찰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9년 승려 양성을 위한 불교 학원을 설립했다. 주요 

사찰로는 묘향산의 보현사, 평양 대성산의 광법사, 금강산의 표훈사 등 65개의 사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는 300여 명, 

신도는 1만여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술하였듯이 이는 정확한 통계 수치가 아니어서 신빙성이 낮다고 할 수 있다.

 

묘향산 보현사. 출처: 오마이뉴스
평양 정릉사. 출처: 통일뉴스

현재 조선불교도연맹의 위원장은 강수린이며, 다른 종교 단체의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최고인민회의 14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있어 정치인으로의 지위 또한 가지고 있다. 

 

강수린 위원장(우측). 출처: 조선신보
강수린 위원장. 출처: 불교닷컴

3. 천도교

 

(1).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1946년 2월 1일 소련군정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을 모체로 하여 탄생하였다. 천도교 청우당이 1946년 2월 8일 창당된 이래 현재까지 계속 존속해 오고 있는 반면,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은 1949년 사라졌다가 1974년 2월 15일 현재의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현하였다.

 

천도교 청우당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고

2020/11/23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권력 기구> 2. 당 조직

 

이 단체는 1970년대 재출현 이후부터 대남선전활동에 이용되고 있으며, 1986년 4월 천도교 창도 126주년 기념행사를 처음으로

개최한 후부터는 해마다 북한의 대외정책을 지지·옹호해 오고 있다. 실제로 조선천도교회는 중요 행사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영도를 받들어 나가야 천도교의 이념이 구현된 지상천국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부자세습체제의 당위성을 부각하기도 했다.

 

현재 북한 내 천도교인은 약 1만 5천여 명, 교당은 52개가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조선천도교회는 우리나라의 사건·사고와도 연관이 많이 되어 있는데, 

육군 중장 예편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제7대 천도교 교령을 맡았던 최덕신이 1986년 북한으로 월북하여 1989년 3월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위원장, 같은 해 5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 남북 합작을 내세우며

우리나라를 압박한 바 있다. 최덕신 사망 후 그 아내인 류미영이 조선천도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 아들인 최인국도 2019년 월북하였으며,
1997년 8월 천도교 24대 교령을 지냈던 오익제 또한 월북하여 2012년 9월 1일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최덕신. 출처: 중앙일보
류미영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노동신문>>. 출처: 뉴시스

 

오익제 전 조선천도교회 고문. 출처: 통일뉴스
최덕신·류미영의 차남 최인국. 출처: 아시아투데이




참고문헌

국가정보원. (2019). 「북한법령집. 상」. 

미국 국무부. (2020). 「2019년도 국제종교자유보고서: 북한」. 

통일교육원. (2020). 「2020 북한이해」.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통일연구원. (2020). 「북한인권백서 20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조선카톨릭협회'. 2020년 12월 27일.

:: CONTENTS ::

 

1. 정론 「인민의 목소리 - 우리 원수님!」

2. 북한 우상화의 근거

3. 북한의 우상화

4. 북한 우상화의 목표

5. 타국에서의 정치적 우상화

 


정론

「인민의 목소리 - 우리 원수님!」

 

북한은 최근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노동신문》은 11일 18일 1면에 전면으로 실은

'인민의 목소리 - 우리 원수님!'이라는 제목의

정론 형식의 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주민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라며

'김정은 조선'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김정은이 지난달 10월 열병식 연설에서 울먹이며

'인민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던 모습과

더 이상 김일성, 김정일의 후광에 기대지 않는 모습

특별히 부각됐다

 

더불어 정론에서 수해복구,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펼쳐 온 노력 등을 거론하고

'이것이 뜻으로 한 모습이 되고

정으로 한 핏줄이 된 위대한 김정은 조선의

일심단결의 위력'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조선'이라는 표현이 북한 공식 매체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이후 간간이 등장했는데,

특히 2016년의 경우 핵 수소탄 첫 시험,

광명성-4호 발사 등 핵 개발과 관련 축하 연설, 글에서

김일성, 김정일과 함께 등장한다

 

이때까지 '김정은 조선'은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나라'라는 뜻이었다

'김정은 조선' 표현을 쓰기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난 달 열병식을 계기로 분위기가 바뀌어

더 이상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가 없다고 해도 '김정은 조선'이 됐다

 

이는

앞으로 '김정은 조선'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는 등

김정은 우상화를 본격적으로 강화해

나갈 것임을시사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더 이상 김일성-김정일의 조선이 아니라

'인민을 한없이 사랑하는 김정은만의 조선'으로

바뀔 전망이다

 

정론은 김정은이 집권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인민대중제일주의'가 바로

'김정은 조선'의 근간이라고 공식화했다

인민대중제일주의는 김정은이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세습이 가능했던 것은

김정은이 인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이지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당 과제로 김정은 우상화가 결정됐고

선전선동부가 이를 앞장서서 집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김정은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나온 것도

그 일환이라고 했다

올해 개정 발간된 김정일에 대한 책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략력'에는

김정일 말년인 2009년에 진행된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를 김정은이 주도해

경제강국건설에 비약과 혁신을 가져왔다는

대목이 새로 실렸다

 

2009년이면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기

전이었는데도, 당원들과 인민들이

김정은의 위인상과 업적의 위대성에 매혹됐다는 것이다

 

한편 11월 20일 《노동신문》은 '축지법의 비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사실 사람이 있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땅을 주름잡아 다닐 수는 없는 것"이라며

"우리가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발톱까지 무장한

강도 일제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와

방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김일성이 항일유격대 시절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이른바 축지법으로

일본군을 무찔러왔다고 선전해왔고

이는 북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북한이 최고 존엄이었던 김일성의 축지법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비현실적인 신비화 전략이 북한 주민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작년 3월

전국 당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며

과도한 우상화를 자제하라고 지시한 것에서도

이 같은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북한 우상화의 근거

 

[ 북한의 정치적 특징 ]

 

북한체제는 당-군-국가체계 위에 구심점으로서

최고지도자(수령)가 군림하는

'수령' 중심의 절대적인 1인 통치구조이다

 

북한에서 수령은 영도의 핵이며,

당은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조직으로

북한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 아래 통치되는

전체주의적인 지배체제이다

 

수령중심의 체제논리는 1974년 발표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과

1982년 김정일이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즉,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따라 수령, 당, 대중이

일심동체가 될 때 공고한 혁명의 주체가 되며,

수령의 유일적 영도에 따라

조직적 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사회주의적 생명체론 ]

 

북한은 수령 유일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생명체론'을 제시하고 있다

수령은 단결과 영도를 중심으로서

당의 '최고령도자'임과 동시에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최고 뇌수'로 규정된다

 

북한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인민대중이 혁명의 자주적 주체로 되기 위해

당의 령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사상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영생하는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북한에서 수령은 전당의 조직적 의사의 체현자이며,

'당의 최고령도자'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령도의 유일 중심"이라 하여

절대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 사회주의 대가정론 ]

 

북한의 사회체제는

집단주의 원칙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이며

수령을 어버이로 하는 '사회주의 대가정체제'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대가정체제의 특징은

다른 사회주의 체제와 다르게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숭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되고 있다

 

북한에는 두 개의 가정이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는 혈육들로 구성되는 보통의 가정과

다른 하나는 수령을 어버이로 하는 '사회주의 대가정'이다

 

사회주의 대가정의 가족 구성원인 북한 주민들은

보통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섬기듯

어버이인 수령에게 충성과 효성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고 있다

 

유교적 관습과 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북한에서

사회주의 대가정론은

"수령, 당, 인민대중을 하나로 묶는

가장 확실한 결합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 백두혈통 ]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3대 세습이 이어지고 있는 혈통을 말한다

1971년 6월 사로청 제6차 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에서 비롯했으며,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후계문제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당시 김일성은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연설에서

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혁명을 계속해야만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우리의 성스러운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언급해

김정일의 등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김일성 사후에도 북한은 대를 잇는 혁명의 계승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으며,

혁명적 전통의 계승은 주체의 혈통론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혈통론에 따르면

당은 수령에 의해 마련된 혈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수령의 당을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로,

수령 혈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혈통론을 통해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수령과 당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규율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체제 안정

도모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혈통과 관련해 일부는 생모 고용희가

북한에서 하위계층으로 분류되는 재일교포이기 때문에,

김정은을 순수 백두혈통으로 취급하지 않기도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통 백두혈통은

김일성-김정일-김정남으로 이어지고,

김정남이 죽은 이후에는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 정통 후계자가 된다

 

그러나 김정남은 김정일이 유부녀였던 성혜림과

불륜으로 낳은 사생아이기 때문에

역시 혈통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김한솔 역시

김정남과 동거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므로

김정은 또한 혈통적 계승권에서 밀리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김정은의 형인 김정남이

그나마 종법제상 김정은보다 계승서열이 높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간부 교육에서

현재 생존한 인물 중 김정은과 김여정만을

백두혈통으로 인정하고

김정철은 인정하지 않는다

 

김평일, 김영주, 김정남처럼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직계가 아닌

김일성 일족은 곁가지로 불리며 경원시된다

친척들 역시 권력투쟁에서 지면 숙청되는데,

김정은의 고모부였던 장성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정일 때까지는 곁가지라도 백두혈통은 죽이지 않는다는

나름의 불문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2017년 김정남이 암살된 것으로 추정돼

그런 불문율 역시 깨지게 되었다

 

 

[ 주체사상 ]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외부세력인 소련과 중국은

1958년 공산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하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단일 체제 수립만 더 강화됐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협상을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우상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처음 등장시키는데,

중국과 소련 등 외세의 영향력 대신 우리의 관점으로

주체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사상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자 주체사상은 '당의 유일한 이념'이자

'혁명과 건설의 지도적 지침'으로 표방되기 시작했다

1970년 제5차 당 대회에서 주체사상을

당의 공식이념으로 채택했고

1972년 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서는

주체사상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규정했다

 

이후 주체사상은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노동당 규약 개정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해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게 됐다

 

1980년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후

주체사상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며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모색했다

 

주체사상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비판

주체사상을 비롯한 북한식 사회주의 이념이

사실상 개인의 권력 독점을 위한 1인 지배체제의

강화와 우상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을 통해 수령과 인민의 관계를

사실상 주종관계로 규정함에 따라

인민을 수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해야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켰다

 

또한 주체사상은 북한에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심각한 경제난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됐다

 


북한의 우상화

 

우상화(cult of personality)는

국부와 영웅주의에 심취해 종교적인 행위로

'신처럼 사람과 사물을 숭배하는 것'이다

존경받을 이유가 있으면 '우상화'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 ]

 

지도자의 이름은 볼드체로 강조하거나

좀 더 크게 적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다

북한 유니코드에는 아예 이들의 이름을

특수문자로 넣어서 치면 자동으로

볼드로 변환되게끔 했다

국제 유니코드에 등록을 신청했으나 거절됐고,

외국 프로그램으로 북한 논문 등을 열어보면

지도자 이름이 □□의 형태로 깨져서 보이지 않는다

 

집에 불이 나면 그 무엇보다

지도자의 초상을 먼저 챙겨야 한다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발가락 하나라도 잘리면 안 된다

 

글을 쓸 때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에서

줄바꿈을 하면 안 된다

북한에서는 자동으로 지도자의 이름은

문장의 맨 앞으로 배열된다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지도자의 이름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은 사용할 수 없다

또한 김일성의 원래 이름인 '성주',

김정일의 옛 이름인 '유라'도 안 된다

예전에 태어나서 이미 이름을 그렇게 정한 사람은

이름을 바꿔야 한다

 

아기가 지도자의 생일에 태어나면

생일을 바꿔야 하며,

지도자가 죽은 날 태어난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지도자 사진과 체제 선전물은 관리를 잘해야 한다

먼지가 쌓인다거나 잉크가 살짝이라도 튀면 안 된다

지도자 사진이 들어간 신문이나 책을

깔고 앉는다거나 찢고 구기는 것도 금지됐다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 등

지도자가 명시한 교리

국립대학에서 매일 시험 본다

토씨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지도자 동상이 가장 많은 나라로,

동상 주변에 감시카메라가 아주 많은 편이다

 

금수산태양궁전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체를 미라화해 보존하고 있으며,

이곳은 북한의 국가적 성지로 취급된다

1873년 처음 착공됐으며,

2층에는 1994년 사망한 김일성,

1층에는 2011년에 사망한 김정일의 미라가 있다

평양순안국제공항 청사보다 규모가 큰

북한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다

김일성은 생전 대성단혁명렬사릉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김정일은 권력 이양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에 사체를 안치했다

매년 1월 1일 자정이 되면 김정일-김정은과

수뇌부 핵심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참배를 하고,

친북 성향의 국가 지도자들이 방북했을 때에도

이곳에서 참배한다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한다

벤치뿐 아니라 현장지도 때 몸을 기댄 나무에도

강화 플라스틱 덮개를 씌운다

현장지도로 방문한 일반 가정은

집의 안팎으로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현판이 달린다

 

김일성-김정숙-김정일-김정은에 관한

우상화 교과서가 있다

공산주의 이념과 목표에 따라 계급의식을 가르치고,

사회와 인민의 이익, 당과 혁명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가르친다

북한에서 그 어떤 교과목들보다도 우선시하고

제일 중요하게 교육하는 과목들로,

보육원 때부터 평생 동안 이 모든 내용을 외우게 한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무리 다른 과목 성적이 좋아도

이 '혁명력사'를 모르면 대학 입학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 김일성 이전 ]

 

김보현은 김일성의 할아버지로,

대한제국의 하급 관료였다

관료 생활을 했고 지주였으므로

북한의 시선에서는 봉건통치배의 앞잡이이자 지주로,

반동분자로 취급돼야 한다

그러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우상화했고

김보현대학을 설립하고

만경대 묘지에 그의 반신상을 설치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극우 반공주의 성향을 띄었으며,

향년 31세로 공산주의 집단에게 피살됐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아내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됐다

평양사범대학을 김형직사범대학으로,

평안북도 후창군을 김형직군으로 개칭했으며

김형직군의대학 등을 설립했다

사후 평양시 강동군, 평안북도 삭주군,

자강도 중간군 등에 동상을 건립했으며

만경대 묘지에 강반석과 함께 반신상이 설치됐다

 

강반석은 김일성의 어머니로,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이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1960년대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주도로

'강반석 여사 따라배우기 운동'이 실시됐다

전국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강반석혁명학원처럼 학교나 탁아소에 이름이 붙었다

 

김형권은 김형직의 동생이자 김일성의 숙부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활동하다 붙잡힌 함경남도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 개칭하고

평양에 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우상화 묘지도 설치했다

 

 

 

[ 김일성, 김정숙 ]

 

김일성을 칭할 때에는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와 경어를 붙여야 한다

1960년대 앞에 붙는 경칭과 찬양의 수사가

180여 자에 달하기도 했다

'어버이 수령'에서 '김일성 그이는 한울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신문, 잡지, 교과서, 학술서적 등 모든 출판물

반드시 김일성 교시로부터 시작해 내용이 서술된다

헌법, 노동법, 토지법, 교육테제 등 모든 법령

김일성의 저작품으로 돼있다

 

김일성의 공식 초상화를 '태양상'이라고 하며

영생의 상징으로 본다

'영원한 수령'이라고 부르며

김일성의 이미지를 화석화시키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1988년 9월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는 김일성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추켜세우면서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고

북한 사회주의 헌법을 '김일성 헌법'이라고 개칭했다

 

한글을 김일성이 완성했다고 가르친다

역사시간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하다 그만 눈이 멀었다.

그래서 우리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한글을 완성했다'라고 배운다고 한다

북한에는 한글날이 없다

 

김일성의 생일(태양절, 4월 15일)이 되면

외국 예술인 초청 공연, 김일성화 전시,

체육 경기 등 대규모 축하 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4월 말까지 진행된다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이다

김경희를 낳다가 과다출혈로 31세에 요절했다

김정일이 김평일을 밀어내고 후계 입지를 다지면서

'백두여장군' 칭호를 받았다

김정일 공식 집권 이후

김일성-김정숙-김정일을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칭하고

김정은 집권 후 넷을 '백두산절세위인'으로 칭한다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개칭됐다

 

 

[ 김정일 ]

 

고기겹빵(햄버거)를 발명했다고 한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도 새 세대는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며

'돈이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며

고기겹빵 공장을 건설시켰다고 한다

 

김정일이 태어날 때 하늘에 밝은 별이 빛났으며,

계절이 갑자기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며

무지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1942년 2월 백두산 밀영의 통나무집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기록인데,

이는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구에서 활동할 당시

머물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게릴라 캠프에서

태어났다는 설(1941년 2월)과 배치되는 주장이다

 

《노동신문》에서 김정일이 관심을 가지고 즐겨 입었던

카키색 집업 상의와 바지의 패션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패션 아이콘이 됐다고 보도했다

 

국영 매체는 김정일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정치인이라 보도했다

김정일의 생일이 되면 세계에서

그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거나

축제를 열어 그를 축하한다고 했다

 

평양방송은 '김정일이 골프 18홀 정규코스에서

38 언더파를 기록했다'고 전하며

그를 타고난 골프 천재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골프를 처음 쳐보고

이와 같은 기록을 달성했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에 의해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북한 헌법을 '김일성-김정일 헌법'으로 채택했다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김정일군사정치대학

처음 등장했다김일성군사종합대학과는 달리

연대장 또는 그 이상의 소수 고위급 군사 장교를

키우는 교육 시설로 추정된다

 

 

[ 김정은 ]

 

2020년 10월,

415문학창작단에서 김정은의 업적을 소재로 하는

첫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소설 『부흥』은 김정은의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사업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이처럼 김정은을 소재로 하는 첫 장편소설을 내놓은 것도

최고지도자의 정통성과 입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북제재, 코로나19, 수해 등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김정은의 활약을 부각하며

내부 결속을 꾀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10월 10일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처음으로 김정은의 이름을 딴 대학이 등장했다

조선중앙통신은"수많은 국방과학기술 인재들을 배출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 종대에 이어

조선인민군, 사회안전군 각급 군사학교 종대가

보무 당당히 지나갔다"고 보도했다

그간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일성정치대학, 김정일정치군사대학 등은 있었지만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이라는 명칭이

북한 매체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정은은 2012년 집권 이후 줄곧 핵 개발과

ICBM, SLBM 개발 등 국방과학기술 분야

큰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이 같은 관심사가 반영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대학이 과거 사이버전을 대비해

평양 교외에 설립한 미림국방대학을

종합대학으로 확대ㆍ개편한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방송도 이 대학에 대해

'수많은 국방과학기술 인재들을 배출한 대학'이라고

소개해 이런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열병식 이후 김정숙해군대학, 김책공군대학,

김형직군의대학, 김철주종합군관대학 등

군 관련 대학의 명칭에서

김씨 일가와 유명 빨치산 이름을 모두 떼어냈다

'백두혈통'에 해당하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제외한 인물의 이름을 떼어내면서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우상화의 목표

 

수령과 인민의 관계를 사실상 주종관계로 규정함에 따라

인민을 수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해야 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켰다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규율을 강요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주체사상과 백두혈통을 통해

우상화를 공고히 했고

김정일은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대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 김일성-김정일의 권위를 빌었으나

열병식을 계기로 후광에 기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꾸준히 우상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우상화뿐 아니라 위기 관리 능력을 과시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최고 존엄이었던 김 주석의 축지법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비현실적인 신비화 전략이 북한 주민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타국에서의 정치적 우상화

 

[ 대한민국 ]

 

이승만은 김일성의 우상화를 보고 김일성 동상보다

더 큰 동상을 서울 시내에 세웠고

본인의 생일날 국민들은 무조건 축하하게 하고

그의 찬가를 불러야만 했다

서울시 이름을 새로 짓는 문제를 두고

'우남'이라는 이승만의 호로 짓게 하자는 의견에

긍정적이었으나

국어 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전두환은 일명 땡전뉴스라는 찬양보도를 강요했는데,

특히 전두환 시기에는 온갖 보도지침과

전두환 우상화가 횡행했다

전두환이 집권을 하기 직전인 1980년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인간 전두환 -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는 특집 기사를 쓰기도 했다

 

 

[ 러시아 ]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가 이뤄졌다

 

특히 스탈린 집권기에는 북한 수준으로

우상화가 절정을 이뤘지만

스탈린 사후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점차 약해졌다

 

 

[ 중국 ]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우상화하기 위해

'위대한 지도자 마오주석'이라고 칭하고

'위대한 지도자이며 최고의 군사령관이고

위대한 선생님이자 위대한 조타수'라고 일컬었다

중국 각지에는 지도자들의 동상이 여러 개 있었으나

1981년 이후 전부 파괴됐고

1990년대부터 개혁개방의 무드로 접어들면서

점차 사라졌다

 

후계자인 화궈펑도 

'뛰어난 지도자 화주석'이라며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을 찬양하는

우상화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겉으로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찬양 움직임 뒤에서는 관영매체들이

은근히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

 


[ 참고문헌 ]

 

강영진, (2020). “김정은 우상화 본격화됐다”, 뉴시스, 11월 19일.

김성완, (2020). “北노동신문에 ‘김정은 조선’ 표현 등장… 본격 우상화 시사”, 천지일보, 11월 18일.

김형수, (2020). “북한 3대 세습이 흑망(3) 김정일, 삼촌 김영주를 숙청한 이유”, 리버티코리아포스트, 11월 17일.

연합뉴스, (2020). “북한, 김정은 소재 첫 장편소설 ‘부흥’ 내놔… 교육정책 우상화”, 10월 23일.

연합뉴스, (2020). “북한서 ‘김정은’ 이름 딴 대학 첫 등장ㆍ 국방과학기술 인재 육성”, 10월 14일.

정승임, (2020). “북한, 김일성 우상화에 썼던 ‘축지법’ 돌연 부정한 이유는?”, 한국일보, 5월 20일.

한경닷컴, (2011). “美 매체가 꼽은 ‘김정일에 관한 황당스토리 5가지’”, 12월 21일.

 

나무위키, https://namu.wiki, ‘우상화’, ‘백두혈통’, ‘금수산태양궁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김형직’, ‘김형권’, ‘김정숙’, ‘김보현’, ‘강반석’ (접속일: 2020년 11월 22일).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https://nkinfo.unikorea.go.kr (접속일: 2020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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