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새롭게 펴낸 김정은의 위인전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 전략이었던 남방외교와 전방위외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021/02/1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대외정책] 3. 냉전 후 북한 대외관계의 전개 및 외교 노선의 변천 (1)

 

이번 포스팅에서는 북한의 전방위외교 수행 이후 불거진 2002년 북핵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6자외교와 신북방외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6자외교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인해 북한의 전방위외교 전략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 등으로 인한 남북한 간 화해·협력 무드는 2007년까지 지속되었고, 

북일관계 개선 노력 역시 200년대 중반까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탈냉전 외교의 핵심이자 북한 외교의 궁극적 목표인 대미외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탈냉전 후 국제 질서는 미국의 패권 하에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미외교의 쇠락은 곧 전방위외교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와 더불어 북중·북러 관계 역시 2000년대 초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정체되었다.

 

대미외교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북한이 상대해야 하는 미국 정부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핵문제를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접근하였는데,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북한과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문제에 접근했다.

이 접근에서는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북한의 핵 위협을

미사일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고자 하였다.

 

부시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비핵화를 정권 붕괴 혹은 그에 걸맞은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로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한편,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 핵포기 후 보상'이라는 일방적 비핵화를 내세움으로써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비협력적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1차 6자회담 당시 참가국 대표들의 모습. 왼쪽부터 일본 야부나카 미토리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 미국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북한 김영일 외무성부상, 중국 왕이 외교부 부부장, 러시아 로슈코프 차관, 한국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 출처: 연합뉴스

 

※ 6자회담(Six-Party Talk)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개최한 다자회담.

2003년 8월 1차 회담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까지 만 5년 6개월간 진행되었다.

1~3차 회담은 탐색전 성격이 짙었고, 4차 회담에서 무려 한 달간의 집중 협상 끝에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성명 도출 직후 미국이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를 실시하면서 협상은 장기 교착 국면에 돌입하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상황이 급진전되어 2007년에는 공동성명 이행 로드맵인 <2·13 합의>와 

<10·3 합의>를 도출하였다. 6자회담은 핵문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의 맹아로 주목받았으나,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한 번도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자주의를 선호하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6자회담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전망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 별다른 성과가 도출되지 않자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했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자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수교·평화협정·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북한의 의도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기존의 반확산 강경정책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확산 정책과 함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의 시도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의 북핵문제 접근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 제공 등을 약속한 합의였다. 그런데 클린턴 시기의 <제네바 합의>와는 달리

<9·19 공동성명>은 합의 이행의 로드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로드맵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북한과 미국의 핵 처리 및 보상 문제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시각 차이로 인해 6자회담 및 공동합의는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설치의 보상과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핵무기 폐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한국의 

핵우산 폐기와 연계하여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북한은 지난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핵 보유국으로의 지위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비핵화를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는 더 간극이 벌어져 향후

<9·19 공동성명>이 가동된다 할지라도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4. 신북방외교

 

6자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장거리로켓을 시험 발사하고(2009년 4월), 연이어 

2차 핵실험(2009년 6월)을 감행했다. 핵문제 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평화협정을 일괄 타결할 수 있는 

협상판을 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의 기조로 북한에 대응했다.

즉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까지 북한의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는데, 2010년 3월 천안함을 어뢰정으로 공격해 침몰시키고 2010년 말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인 연평도에 포격을 감행했다.

이에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협상을 재개했으나 이는 문제 해결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전까지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당시의 모습. 이 포격으로 인해 우리 군 2명과 주민 2명이 사망했다. 출처: 연합뉴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내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준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여기에 호응하여 오바마 재선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이었던 

위성 발사를 미뤘으나 예상과 다르게 오바마 재선 이후 대북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되었다.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선언했고, 국방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으며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처럼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오바마 행정부 이후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북중관계는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밀착되었다.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대북정책 재검토를 거쳐 북한 문제와 핵문제를 분리하고 북한 안정화를 최우선 하는 정책을 채택하면서

북중 간 경제협력을 확대시켜 북한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는 시도를 하였다.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막힌 상황에서 북한의 중국의 관여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관계 밀착에도

신경을 썼다. 냉전시대의 북방외교와 같이 북한은 자국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그 예로써 2005년부터 나진항 개발을 두고 전개되고 있던 중러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의 활용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김정일의 대외 행보인데, 김정일은 2010년 5월8월, 그리고 2011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고, 2011년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중국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

탈냉전 후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자주 북방의 동맹국들을 방문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대화하는 김정일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한편 냉전시기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양측의 갈등상태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했었던 전략적 차원의 북방외교와

이 시기 신북방외교에는 다소 성격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냉전시기의 소련과 중국은 군사 충돌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갈등상태가

지배적이었던 것에 반해 2010년대의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협력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협력은 미국이라는 

공동의 경쟁국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저울질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반사이익은

냉전시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2010년대에 진행되었던 신북방외교는 북한의 이익 추구를 위한 외교 행보라기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생존을 위한 협력체계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탈냉전 이후 김정은 집권 전까지의 북한의 여러 외교 전략과 행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김정은 시기 외교 전략의 특징과 함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