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새롭게 펴낸 김정은의 위인전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 전략이었던 남방외교와 전방위외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021/02/1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대외정책] 3. 냉전 후 북한 대외관계의 전개 및 외교 노선의 변천 (1)

 

이번 포스팅에서는 북한의 전방위외교 수행 이후 불거진 2002년 북핵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6자외교와 신북방외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6자외교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인해 북한의 전방위외교 전략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 등으로 인한 남북한 간 화해·협력 무드는 2007년까지 지속되었고, 

북일관계 개선 노력 역시 200년대 중반까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탈냉전 외교의 핵심이자 북한 외교의 궁극적 목표인 대미외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탈냉전 후 국제 질서는 미국의 패권 하에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미외교의 쇠락은 곧 전방위외교의 쇠락을 의미했다.

이와 더불어 북중·북러 관계 역시 2000년대 초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정체되었다.

 

대미외교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 것은 북한이 상대해야 하는 미국 정부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핵문제를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접근하였는데,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북한과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문제에 접근했다.

이 접근에서는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북한의 핵 위협을

미사일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고자 하였다.

 

부시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비핵화를 정권 붕괴 혹은 그에 걸맞은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로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한편,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 핵포기 후 보상'이라는 일방적 비핵화를 내세움으로써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비협력적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1차 6자회담 당시 참가국 대표들의 모습. 왼쪽부터 일본 야부나카 미토리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 미국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북한 김영일 외무성부상, 중국 왕이 외교부 부부장, 러시아 로슈코프 차관, 한국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 출처: 연합뉴스

 

※ 6자회담(Six-Party Talk)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개최한 다자회담.

2003년 8월 1차 회담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까지 만 5년 6개월간 진행되었다.

1~3차 회담은 탐색전 성격이 짙었고, 4차 회담에서 무려 한 달간의 집중 협상 끝에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성명 도출 직후 미국이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를 실시하면서 협상은 장기 교착 국면에 돌입하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상황이 급진전되어 2007년에는 공동성명 이행 로드맵인 <2·13 합의>와 

<10·3 합의>를 도출하였다. 6자회담은 핵문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다자안보협력체의 맹아로 주목받았으나,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한 번도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자주의를 선호하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6자회담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전망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 별다른 성과가 도출되지 않자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했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자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수교·평화협정·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북한의 의도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기존의 반확산 강경정책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확산 정책과 함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의 시도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의 북핵문제 접근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 제공 등을 약속한 합의였다. 그런데 클린턴 시기의 <제네바 합의>와는 달리

<9·19 공동성명>은 합의 이행의 로드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로드맵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북한과 미국의 핵 처리 및 보상 문제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시각 차이로 인해 6자회담 및 공동합의는 현재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설치의 보상과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핵무기 폐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한국의 

핵우산 폐기와 연계하여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북한은 지난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핵 보유국으로의 지위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비핵화를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는 더 간극이 벌어져 향후

<9·19 공동성명>이 가동된다 할지라도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4. 신북방외교

 

6자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장거리로켓을 시험 발사하고(2009년 4월), 연이어 

2차 핵실험(2009년 6월)을 감행했다. 핵문제 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평화협정을 일괄 타결할 수 있는 

협상판을 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의 기조로 북한에 대응했다.

즉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까지 북한의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는데, 2010년 3월 천안함을 어뢰정으로 공격해 침몰시키고 2010년 말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인 연평도에 포격을 감행했다.

이에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협상을 재개했으나 이는 문제 해결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전까지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당시의 모습. 이 포격으로 인해 우리 군 2명과 주민 2명이 사망했다. 출처: 연합뉴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내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준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여기에 호응하여 오바마 재선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이었던 

위성 발사를 미뤘으나 예상과 다르게 오바마 재선 이후 대북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되었다.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선언했고, 국방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으며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처럼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오바마 행정부 이후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북중관계는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밀착되었다.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대북정책 재검토를 거쳐 북한 문제와 핵문제를 분리하고 북한 안정화를 최우선 하는 정책을 채택하면서

북중 간 경제협력을 확대시켜 북한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는 시도를 하였다.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막힌 상황에서 북한의 중국의 관여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관계 밀착에도

신경을 썼다. 냉전시대의 북방외교와 같이 북한은 자국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그 예로써 2005년부터 나진항 개발을 두고 전개되고 있던 중러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의 활용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김정일의 대외 행보인데, 김정일은 2010년 5월8월, 그리고 2011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고, 2011년 8월에는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중국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

탈냉전 후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자주 북방의 동맹국들을 방문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대화하는 김정일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한편 냉전시기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양측의 갈등상태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했었던 전략적 차원의 북방외교와

이 시기 신북방외교에는 다소 성격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냉전시기의 소련과 중국은 군사 충돌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갈등상태가

지배적이었던 것에 반해 2010년대의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협력이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협력은 미국이라는 

공동의 경쟁국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저울질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반사이익은

냉전시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2010년대에 진행되었던 신북방외교는 북한의 이익 추구를 위한 외교 행보라기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생존을 위한 협력체계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탈냉전 이후 김정은 집권 전까지의 북한의 여러 외교 전략과 행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김정은 시기 외교 전략의 특징과 함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2018년 6월 싱가폴에서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출처: 연합뉴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소련의 붕괴로 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 넘게 지속되었던 냉전 체제가 와해되자 북한 또한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통일, 소련의 붕괴가 야기한 탈냉전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오랜 적대와 반목의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일견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탈냉전은 대단히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북한은 탈냉전의 세례와 긍정적 영향을 받지 못한 유일한 국가로 낙오되었다.

대한민국의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로 인해 한중관계가 빠른 속도로 밀착되면서 북한은 구 사회주의권에서도 점점

고립되어 갔다. 다시 말해 1990년 9월 한국·소련 수교와 1992년 10월 한국·중국 수교에 따른 냉전형 동맹관계의 해체는 

북한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위기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간 북한의 안보와 경제는 전적으로 소련과 중국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대한민국과의 밀착관계는 상당한 위협이었고, 북한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비대칭전력인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북한의 핵 개발은 군사적 용도로의 활용과 더불어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카드라는 

이중적 성격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로 점철된 탈냉전의 출현인 20세기 말, 21세기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북한은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현재까지 변천해왔는데, 아래에서는 북한이 탈냉전을 맞이하며 구사하였던 외교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남방외교

 

탈냉전 초기 북한의 최대 관심사는 탈냉전 후 급물살을 펼치게 된 자유·공산 진영 간 전 세계적 화해 모드 속에서의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북한이 내세운 외교적 목표는 한국이 소련과 중국에 그러했던 것처럼,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개선을 중심에 두고 남북관계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교차승인 전략인 '남방외교'였다. 

 

당시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은 한국과 일본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는 우회전략을 구상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서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워싱턴으로 올 수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미·일 3각 동맹체제에서

일본 역시 미국과 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북미관계와 북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선에서 대남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은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이는 듯했는데, 일본과는 1990년 9월 조기 국교수립을 약속한 

<조선노동당·자민당·사회당 3당 공동선언>을 도출했고, 한국과는 1990년 9월부터 총리급 회담을 개최하여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행보는 1992년 1월에 김용순 조선노동당 국제비서와 아놀드 켄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 사이의

역사상 첫 번째 북미 고위급회담의 성사를 가능하게 했다.

 

 

1990년 김일성과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왼쪽),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오른쪽)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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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노동당·자민당·사회당 3당 공동선언>의 일부.

3당은 일조 양국간에 존재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해소하고 가능한한 빠른 시기에 국교관계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3당은 일조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각분야에 있어서 교류를 발전시키고 통신위성의 이용과

양국간 직항로 개설문제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3당은 조선은 하나이며 남과 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하는 일이 조선인민의 민족적 이익에 합치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3당은 평화적이고 자유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앞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 대하여

핵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음에 동의했다.

 

그러나 1992년 가을부터 북한의 이러한 행보에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는데, 92년 10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전기획부에서 

북한의 간첩단 사건인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하고, 같은 달 일본에서는 <3당 공동선언>의 주역인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이 대일관계의 개선 및 북일수교라는 정치적 동력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에 따라 1991년부터 진행되어온 수교 협상은 1992년 11월 제8차 협상을 마지막으로 중단되고 만다.

 

일본과 한국을 경유하여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개선을 노렸던 북한은 북일, 남북관계가 모두 막히게 되자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목표로 과감한 핵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미국으로의 접근이 1차 남방외교였다면, 2차 남방외교는 

북미수교로 직행하려는 핵 강압 외교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외교 전략 노선 변경의 시발점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를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상정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은 미국을 협상의 자리로 끌어 오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시도로 양국은 1993년 6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3차례의 고위급회담을 열어 

핵문제를 협상하고,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US-DPRK Agreed Framework)를 도출했다. 

 

1994년 제네바합의문에 서명하는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출처: 중앙일보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 그리고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북한을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북미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합의 이후 이행이 순탄치 않았는데, 합의 직후 미국의 의회는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고, 북한은 

김일성 사망 후 '선군혁명'에 직면했다. 양국 내부에서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제네바합의의 이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는데, 

특히 북한 내부에서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가 발생하면서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남방외교 전략은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대외관계 노선의 변경을 야기하게 되었다.

 

 

2. 전방위외교

 

1994년 김일성 사후 3년간의 유훈 통치 끝에 1998년 8월 북한 최고지도자로 공식 등극한 김정일은 대내 안정을 바탕으로 

과감한 외교적 접근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대포동 미사일 시험 발사(1998년 8월 31일)가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1998년 8월 31일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소식을 알리는 KBS 뉴스. 출처: KBS NEWS

 

이로 인해 제네바합의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했고, 페리가 의회 및 관련 부서와 조율을 거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제네바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 사회의 제재에도

북한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의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관여는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이러한 원칙을 견지한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200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내용이었다.

 

2000년 10월 김정일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난 조명록 차수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이 합의 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또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면담을 진행했으며,

북미수교를 확정 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문 일정 또한 잡히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뿐만 아니라 그간 단절됐던 북중·북러 관계 복원에도 나섰는데, 이는 1990년대의

남방외교의 성격과는 구분되는 전방위외교의 특징이 드러난 외교 전략이었다.  

 

북한은 김정일 체제 출범 직후부터 북중관계 개선에 나서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끈

대규모 대표단의 방중을 성사시켰다. 이는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이후 7년 만의 관계 복원이었다. 

이후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김정일의 방중, 2001년 9월 장쩌민의 방북으로

양국 최고지도자 간의 협의 채널이 복원되었다.

 

2001년 9월 북한을 방문한 장쩌민과 김정일의 모습. 출처: 동아일보

북러관계 역시 개선되었는데, 1990년 3월 한소수교 직후 폐기되었던 <북소 동맹조약>을 대신해 

<북러 우호선린협조조약>이 가조인되었으며, 2000년 7월에는 소련을 포함한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지도자(푸틴)이 평양을 방문했다. 여기서 양국은 <북러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침략위험이 조성되거나 평화와 안전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조성되면 지체 없이 서로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다.

이어 2001년 8월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방문, 푸틴과 함께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북러 친선협조관계를 더욱 발전"

시킨다는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난 푸틴의 모습. 출처: 연합뉴스

 

주변국의 잇따른 대북관계의 개선 행보는 일본의 대북 접근 또한 유도하였는데, 북일 양국은 1992년 이후 중단됐던 

수교협상을 2000년부터 재개하고 북송 재일교포들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어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으로 사상 처음으로 북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여기서 김정일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등 적극적인 대일관계 개선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후 2004년 5월에 열린 제2차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인 가족들을 송환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그러나 이후 '메구미 사건' 등 일본인 납치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일본 내에서 대북 강경 여론이 부상, 

북일수교는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국내 여론의 견제 등으로 인한 장애물에 부닥치자 일본은 

북일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대북 강경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북한에 피랍된 일본인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 메구미 사건: 북한은 1977년부터 1985년 사이에 대남 공작을 위해 일본인 15명을 납치했다. 2004년 11월 북일수교를 위한 협상에서 일본이 귀국한 5명 외의 

10명에 대한 안부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은 10명 가운데 8명은 사망했고, 2명은 입국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3세 때 납치됐던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에 건넸는데,

유골이 메구미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일본 내 반북 여론이 일면서 2006년 2월을 마지막으로 북일 사이의 수교 협상은 중단되었다.

 

한편 북한의 전방위외교는 주변국을 넘어 유럽연합과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되었는데, 북한은 2000년 1월 이후 

유럽연합 국가들과의 국교수립을 추진하여 27개 회원국 중 25개국과 수교를 성사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외교관계도 복원하였는데, 원래 동남아시아는 냉전 시기 비동맹외교 차원에서 북한이 전략적으로 

중시했던 지역이었으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비동맹외교가 무의미해지면서 경제협력의 파트너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이에 북한은 1999년 1월 브루나이, 2000년 7월 필리핀과 수교하여 1983년 아웅산 테러로 국교가 단절된 미얀마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2000년 7월에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도 가입하였다. 

이후 북한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양자·다자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2007년에는 미얀마와 국교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전방위외교는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 그리고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발발로 장기간의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어 외교 전략의 변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등장하게 되는 6자외교, 신북방외교 등이 바로 그러한 대안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신윤재. (2020). "北에 끌려가 못 돌아온 13살 소녀..."아베가 책임져야", 매일경제, 7월 11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중앙일보. (1999). "김일성­가네마루회담 공동선언 전문", 중앙일보,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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