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권력 3대 세습체제 비교 (출처: 헤럴드경제)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며 북한의 세 번째 지도자인 김정은의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선대(先代)인 김정일의 선군정치, 직할통치와는 다르게 

김정은 시대의 특징으로는 선당정치, 경제·핵 병진노선, 노동당 정치국회의 정상화 등이 꼽힌다.

이와 같은 김정은 시대의 특징을 2010년대 초, 북한 권력구조 변화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김정은 정권 '제한적 단일지배체계'로 출범

 

 김정은의 후계과정이 짧았던 만큼, 김정은 정권은 공고한 권력이 형성되기 전에 출발하였다. 북한은 김정일이 사망한 날부터 김정은이 유일적 영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으나, 현실은 권력의 집중도 면에서 유일지배체계, 단일지배체계보다 낮은 수준인 '제한적 단일지배체계'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주요 국가정책을 김정은 혼자 최종 결정하기보다는 그를 후견·지지하는 세력과 또는 각 진영의 대표들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공고한 권력 부재는 최고지도자-핵심 엘리트 간의 관계에서도 특징되어 나타났다.

김정일 정권과 김정은 정권의 최고지도자-핵심 엘리트 간 수직적 지배체계의 모습에서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김정일 정권에서는 당제도화를 약화시키고 ··군에 대한 직할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지도자와 핵심 엘리트 간 경계가 명확하고 최고지도자가 핵심 엘리트 위에 군림하였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초기에는 군림보다는 핵심 엘리트들이 최고지도자를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는 최고지도자와 엘리트간의 경계가 불명확함과 더불어 관계에서도 일방적 지시에서 상호의존 형태로 변화한 것을 의미하였다.

직할통치가 약화되며 당제도화가 일정 부분 회복되었고, 선군정치 아래에서 제한적 간헐적으로 실시되었던 내각책임제가 강화됨으로써 당··군의 수평적 역할 분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와 7월 리영호 숙청을 지나면서 김정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 당··군의 최고직책을 다 가지게 되었으며, 비대해진 군의 역할을 재설정하기 위해 군부 서열 1위인 총정치국장에 민간 당료 출신인 최룡해를 임명함으로써 리영호와 같은 야전군인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7월 리영호의 숙청은 북한 핵심엘리트 구성이 변화된 것임을 시사하였다.

 

김정일의 지도하에서 군부가 중심세력이었던 것에 반해, 김정은의 측근은 족벌과 공안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4년 동안, 군 지휘부와 공안기관 책임자들이 전원 교체되었으며 이러한 잦은 교체 과정을 통해 김정은의 권위와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민간 당료 출신 최룡해의 총정치국장 임명함으로써 군에 대한 당적통제가 강화되었으며, 이는 야전군인 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중심세력의 교체는 정권 초기 제한적 단일지배체제가 점차 단일지배체제로 이행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고모부 장성택 숙청

2013년 12월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숙청된다.

그는 김정일이 후계작업의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으로서, 김정일 사후 김정은 후계체제 출범에 절대적 기여를 한 바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가 그를 숙청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권력 체제에서나 2인자의 처지는 곤란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체제의 경우, 그리고 권력승계에 대한 공개적인 규칙이 결여된 체제인 경우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북한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며, 따라서 후계작업을 통해 강화된 장성택의 권력은 최고지도자에게 있어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성택 숙청의 직접적 계기로 외화벌이 문제를 둘러싼 군부와의 갈등, 김정은의 자금관리 기구인 '39호실' 지휘권 갈등 등이 거론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숙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성택 숙청 사건은 당제도화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정은은 당을 통한 통치, 즉 당의 제도화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를 위해 정권 출범 이후로 당대회, 전원회의, 정치국 회의를 수차례 개최하였다. 그는 집권 이후 주요 인물들의 숙청에서도 이를 활용하였는데, 2012년 7월 당 정치국회의에서는 리영호를  2013년 12월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해임함으로써 당기관의 정치적 위상을 증대시켰다. 

 

 

 

□ 김정은 시대의 권력구조 특징 정리

- '수령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정치'에서 '정치 시스템에 의한 정치'로의 전환 추진

- 김정일 시대에 약화된 당을 북한정치의 중심으로 복귀

- 경제발전과 체제 보위를 위해 내각과 군대의 독자적 역할을 보장

북한 권력구조의 변화도,「김정은 정권의 수령제와 당,정,군 관계」,김갑식(2014) 발췌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2장 '권력구조와 엘리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김갑식. (2014). 김정은 정권의 수령제와 당,정,군 관계. 한국과국제정치(KWP), 30(1), 29-64.

한승동. (2016). "장성택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나?", 한겨례, 2월 4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사회평론, 2013.

 

 

'세대교체'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특정한 성향을 가지며, 같은 요인에도 다르게 반응한다.

 

이러한 인류보편적인 변화는 북한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바이며,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의 세대 구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처: the300


 

▣ 북한의 세대 구분

 

세대 혁명 1세대 혁명 2세대 혁명 3세대 혁명 4세대
활동시기 및 출생년도 항일무장투쟁 참가자 한국전쟁, 전후복구 참여자 50년대 중반~70년대 중반 출생자 7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
지도자 김일성 김일성 김정일 김정일
특징 - 정규교육 못 받음

- 사상성 강함
- 정규교육 못 받음

- 사상성 강함
- 일제폭압과 전쟁 겪지 않음

- 정규교육 받기 시작

- 김정일 당사업 개시時 출생함

- 성장기 물질적 혜택 받음
- 일제폭압과 전쟁 겪지 않음

- 정규교육 수혜자

- 김정일 후계자 확정 이후 출생함

- 성장기 물질적 혜택 받음. 그러나 고난의 행군을 겪기도 함

※자료: '김정일 시대 권력엘리트 변화', 2009년 김갑식(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김정일 시대부터 북한은 세대를 구분할 때, 주체사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와 역사 발전에서 차지하는 해당 역사적 시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 특히는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을 기본으로 하여 규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쉽게 풀어 설명해보면,

주체사상 관점에서 '1세대, 2세대는 조국을 광복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서 위훈을 세운 세대이며(1세대 2세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 3세대, 4세대는 그것을 튼튼히 고수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히 발전시키며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세대(3세대 4세대의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로 구분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세대 구분에서는 단순연령효과(age effect)보다 동년배효과(cohort effect)를 기본으로 하여 역사적 경험을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동년배효과(cohort effect): 일정 단위로 구분한 출생집단의 특징들을 기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효과를 말한다. 다른 시기에 출생한 각 집단은 심리, 사회, 문화적 특성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며 이를 각기 다른 동년배간의 효과라 한다.

 

북한의 이러한 세대 구분은 몇몇 부분에서 모호한 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1세대 항일빨치산 세대, 2세대 한국전쟁 참전세대, 3세대 전후세대, 4세대 고난의 행군 세대'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장마당세대(1980~90년대 출생)

 

출처: 조선중앙TV 캡쳐

전문가들은 북한의 청년 세대를 ‘장마당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1980-90년대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고난의 행군’을 겪었으며, 부모 세대와는 다른 성향을 띄고 있다.

 

장마당 세대가 부모 세대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노동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보다 돈벌이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 문화에 노출이 많이 되었으며, 시장경제 체제에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탈북민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장마당 세대가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지만 체제에 불만이 많다고 한다.

오랜 군 복무기간 성분문제가 이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이다.

북한의 군 복무기간은 10년이며, 장마당 세대는 이 기간 동안 장사를 통해 벌 수 있는 액수를 떠올리며, 자기 인생을 소모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북한은 전체 주민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 3계 계층 51개 부류로 나눴기 때문에, 이에 따라 출신 성분이 나쁜 젊은이는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해도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에 갈 수 없다.

 

현재 장마당 세대는 약 2천500만에 달하는 북한 인구의 14%에 해당되는 3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 세대교체와 간부 선발

 

출처: 연합뉴스

북한은 간부 등용에서도 세대교체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져 온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시대에는 간부 등용에 있어 출신 계급이 무엇보다 중요시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인텔리 계급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노동계급, 고농, 빈농 출신들이 간부 선발에 있어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 전문성, 능력, 학력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2006년 1월 김정일이 직접 "간부는 지식이 있어야 발언권이 서고 제 구실을 할 수 있고 공부를 하지 않아 지식이 없는 간부는 발언권이 설 수 없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지도자인 김정은과 여동생인 김여정이 서방국가인 스위스에서 유학을 한 점은 김정은 시대에는 이전 세대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이번 8차 당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조용원

이번 8차 당대회는 북한이 간부들을 대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북한 권력의 핵심체이자 절대권력기관으로서 당의 모든 정책을 수립∙결정하는 정치국(Politburo) 구성원들의 평균 연령이 5년 전 당대회 때와 비교해 9세 정도 젊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이 등용되고 중용되는 간부들에 의해 어떠한 정책의 변화가 있을지, '세대 변화 측면'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2장 '권력구조와 엘리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김당. (2021). '김정은, 북한 권력층 세대교체…9세 젊어졌다', UPI 뉴스, 1월 13일

이재원, (2018). ''N세대' 김정은, 상상 이상의 '새로운' 북한', 머니투데이, 5월 1일

최원기, (2020). '북한 '장마당 세대', 부모와 정치·경제 성향 크게 달라', VOA 뉴스, 9월 25일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사회평론, 2013.

출처:연합뉴스

 

1인 집권체제인 북한에게 있어 권력의 승계과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모두 알다시피 현재 북한은 3대째 세습 중이며, 이 과정 속에서 2번의 승계과정을 거쳤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김일성→김정일'로 '김정일→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정일 - 김정은 승계과정 비교

 

김정일과 김정은 후계구도 비교

 

차이점 (1):  '후계검증 기간'

김정일은 1973년 당 조직부와 선전부를 장악하고 1974년 정치국원에 임명됨으로써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 이후 6년간의 후계 검증 기간을 거쳐 1980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에 피선됨으로써 공식적 후계자임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었다.

 

반면, 김정은 21개월이라는 매우 짧은 후계검증 기간을 가졌다. 2009년 김정은의 생일날인 1월 8일, 김정일이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제1부부장에게 하달하며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며, 이후 21개월간 대외적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다가, 2010년 9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정과 당 중앙위원 그리고 인민군 대장 등 공식 지위에 선출되며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었다.

 

 

왜 이토록 기간 차이가 나는 것일까?

 

 

- 김정일의 권력승계

김정일이 6년이란 긴 후계기간을 가진 이유는 대내외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다.

김일성이 권력승계를 대외적으로 최초 언급한 시점은 1971년 6월 24일 개최된 「조선사회주의 로동청년동맹」 제6차 대회에서 연설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승계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8월종파사건'이 있은 이후, 소련과 동구권에서의 변화와 중국과 소련의 분쟁 등.. 혼란한 환경적 변화를 보며 권력승계문제를 염두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대내외적 긴장상태를 자신의 권력강화개인숭배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속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개인숭배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더불어 '갑산파사건'과 '김창봉·허봉학 사건'과 같은 2인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면서 '혈연관계에 의거한 선위 방식'의 권력승계 계기가 앞당겨졌다.

 

 

- 김정은의 권력승계

김정은의 승계과정은 김정일때와 달리 매우 압축적이며 빠르게 이루어졌는데,  빠른 승계과정을 거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평가된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고, 이와 같은 최고지도자의 급격한 건강악화는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승계과정의 속력을 높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내정한지 3년 만에 김정일이 사망한 사실로 보아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경제적 상황 악화도 후계체제구축에 속도를 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당시 북한은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악화 그리고 대(對) 중국 의존도의 심화 등 대내외적 불안 요인들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김정은으로 하여금 3대 후계체제의 구축 속도를 빠르게 진행하여 유일적 지도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차이점 (2): 권력승계과정의 단계

북한의 권력승계 단계는 '호칭 등장 - 공식활동 - 외교무대 등장 - 현지지도(실무지도) - 진한 글씨체로 이름 게재(노동신문 등) - 노작 발표 - 당·정·군 최고 직위승계'로 구분할 수 있다.

 

승계과정 중, 공식활동을 개시한 시점도 두 과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김정일의 경우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었고, 이후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사진이 실린 건 1980년대였다. 즉, 후계자 지명 후 6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얼굴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반면, 김정은은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공표되고 바로 당일 찍은 기념사진을 통해 노동신문 1면에서 모습이 공개되었다.

 

당·정·군 최고 직위승계과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생존해 있었던 때에 최고사령관직(군)을 물려받았지만, 나머지 직책의 이양은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한참 걸렸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이 3~4년의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였고, 당 총비서(당)에는 1997년 10월에, 국가기관 최고 직책으로 강화된 국방위원장에는 1998년 9월에야 취임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직후, 2011년 12월 최고사령관으로 추대,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의와 제12기 5차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당 제1비서, 당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 제1위원장 등 당·정·군의 모든 직위에 등극하며 초고속적이고 압축적인 권력승계를 이뤘다.

 

김정일의 경우, 20년 정도의 지도자 수업으로 리더십이 확고하고 고난의 행군으로 불릴 만큼 북한 경제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1998년 북한 경제의 추락세가 멈추고 4년 만에 비로소 김정일은 강성대국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권을 공식 출범시켰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의 공식 출범은 4개월 만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직 확고하지 않은 리더십으로 인한 체제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조기에 출범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김주수, 문은석, 윤희철. (2014). 김정일과 김정은의 권력승계과정 비교를 통한 남북관계 전망. 대한정치학회보, 22(2), 47-69.

송정호. (2005). 북한 권력승계문제의 쟁점과 전망: 사회주의 사례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7(3), 7-51.

서유석. (2013). 북한 권력승계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북한, 497(497): 94-100

권순철. (2012). "젊은 후계자는 북한을 어디로 이끌까", 주간경향, 1월 3일

백인주. (2015).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유코리아뉴스, 3월 16일

엄기영. (2010). "김정일 16년 걸렸는데… 김정은 ‘권력접수’ 3년내 끝낼듯", 국민일보, 9월 29일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13. pp.151~153

 

우리는 흔히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 왕조국가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우리는 북한의 정치체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를 알기위해서 우리는 북한의 정치체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시각은 크게 사회주의 일반론북한 특수론 둘로 나누어져 연구가 진행 되어왔다. 

말뜻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보이는 일반성 측면에서 북한을 접근하는 방법이며,

후자는 다른 사회주주의 국가들과는 차별되는 북한만의 특수성에서 접근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살펴 볼때는 '당-정-군의 관계'가 중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고권력의 소재와 그 관계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구조는 당-정-군의 삼위일체로 구성되며 그 중 당 주도의 지배 패턴으로 특징이 지어진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특징은 북한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제제는 다른 사회주의와 하나의 큰 차이점을 보인다.

바로 '수령제'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출처: 조선일보)

일반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 정치국'이 최고결정권을 가지는 '집단지도체제'이다.

비서국의 당총서기는 정치국의 일원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정치국원들 중 '첫 번째'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령제인 북한은 최고결정권이 오직 수령에게만 존재한다.

따라서 북한의 정치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정-군 관계'와 함께 '수령제'를 살펴봐야 한다.


1. 김일성 시대:  수령제의 형성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체제는 일반적으로 '당국가체제(party-state system)'이다. 즉, 당이 다른 기구들보다 앞선다는 의미이다. 이를 바탕으로 당은 국가기관과 군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북한은 여기에 '수령'이라는 개념이 추가된다. 1967년부터 유일사상체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당-정-군 위에 수령이 위치한 이른바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구축하면서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를 수립하였다. 

 

수령제란,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초집중화 되어 있는 체제로서 절대적 지도자인 수령의 정치적 권위와 영향력이 현저한 체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령제는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의 특성에 최고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인격적 지배가 특성을 이루는 전통적인 봉건적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1980년대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정치경제적 위기에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최고지도자인 수령을 정점으로 당-국가체제가 안정되어 있으며, 승계의 위기나 정통성의 위기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처럼 수직적인 구조의 사회를 수령의 절대적 통치에 대한 숭배와 이데올로기가 뒷받침 함으로써 전체사회가 일사분란하게 작동된다.

 

북한이 이러한 수령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8월 종파사건' 때문이다.

8월 종파사건이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계기로 김일성을 당에서 축출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주도자들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50년대 북한은 만주파,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연합에서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들간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였으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이 출범하게 되면서 내부적인 불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경제재건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김일성 지지세력과 반대파인 연안파(최창익, 서휘, 윤공흠 등), 소련파(박창옥, 김승화 등)세력들의 대립이 있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반(反)김일성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반(反)김일성 운동이 본격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에서 후르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안파와 소련파에게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김일성과 그 추종 세력을 꺾기란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김일성은 반대세력을 소련의 지도노선을 추종하는 교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인의 세력을 확대하고 반대파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김일성은 이 사건을 주동하였던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1인 지배의 독재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교조주의: 특정한 교의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

 

이후 김일성은 60년대 중반,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4~15차 회의에서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조치를 채택하였고, 위원장-부위원장 직제를 총비서-비서 직제로 개편, '범빨치산파'숙청을 통해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는 80년대에 이르러 김정일에 의해 제기된 1986년 '사회정치적 생명체론'과 1987년 '주체의 혁명관'으로  이론적 토대가 완성된다.

 

 

 

2. 김정일 시대:  수령제의 발전

소련의 붕괴와 레닌동상 철거 장면

이론적 토대에 더불어 '1990년대 북한의 위기'는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를 강화시켰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으며, 전세계적으로 시장경제가 확산되며 달러가 부족한 북한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북한체제는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였기 때문에 경제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내외적으로 암울한 상황은 김정일에게 하여금 '당의 활동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형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북한 정치체제의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의 발전은 김정일 후계 작업 차원에서 '당으로 부터 정과 군을 분리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1992년과 1998년의 두 차례의 헌법 개정으로 이루어진다.

 

1992년 헌법 개정으로 기존 중앙인민위원회 속해 있던 '국방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와 동급 또는 상위에 배치하며 일체 무력 지휘와 통솔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중앙인민위원회의 군에 대한 지도 권한을 삭제하였다. 그리고 1993년 김정일은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출 되었으며, 1997년에는 당규약에는 없는 '당총비서'로 추대되어 1인 체제를 강화했다.(기존 당규약에는 '당중앙위위원회 총비서'라는 명칭으로 직함이 명시 되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당중앙위원회'를 뺀것은 1인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그리고 1998년 김일성 헌법은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김일성 헌법은 국가주석직과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내각의 역할을 강화했다. 이러한 헌법개정에 의한 중앙인민위원회의 폐지는 당의 타 기관과의 협의 채널을 없앰으로써 당-정-군이 각기 뚜렷히 나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는 수령의 직할 통치당-정-군의 역할분담을 구조적으로 가능케 만들었다. 

 

이처럼 국가기관이 새로이 정비됨에 따라 김정일은 당총비서,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의 직위를 각각을 직할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일 시대 권력구조, 「현대북한학강의」 발췌

김정일 시대에는 당대회, 전원회의, 정치국회의 등 최고지도자의 권력행사를 제한하는 각종회의들이 열리지 않았으며, 김정일 측근으로 구성된 '당 비서국'이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대신하여 사실상 최고집행기관으로 실질적인 국정을 주도했다. 

 

 

북한의 선군정치 선전 (출처: 코나스 넷)

1990년대 초중반 북한은 체제유지와 경제발전을 위해 '내각책임제''선군정치'를 수령중심의 당국가체제 발전의 기제로 삼았다.

경제개선을 위해 도입된 '내각책임제'는 당 내부의 경제관련 부서의 숫자를 대폭 줄여 내각에 대한 당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며, 내각의 자율성을 증가시켰다. 또한 '선군정치'는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국방력 강화를 목표로 삼았으며, 인민군대를 혁명의 제 1기둥, 혁명의 주력군으로 바라 보았다. 이로인해 군은 위상강화와 더불어 당에 대한 상대적인 자율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정-군 관계에 있어서 당의 우위성은 여전했다. 정에는 경제관리에 당의 간섭을 제도화 하고 있는 '대안의사업체계()'가 있었으며, 군 내부에서는 '총정치국'이 군의 당적통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안의사업체계: 공장·기업소들이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밑에 모든 경영 활동을 진행하며,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생산자 대중을 발동하여 제기된 경제과업을 수행하며 위가 아래를 책임적으로 도와주는 경제관리체계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2장 '권력구조와 엘리트'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김갑식. (2014). 김정은 정권의 수령제와 당,정,군 관계. 한국과국제정치(KWP), 30(1), 29-64.

정우곤. (1997). ' 수령제 ' 의 형성과 대외관계. 시민정치학회보(고황정치학회보), 1(0), 137-156.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사회평론,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지식사전」

국가정보원. (2019).  「북한법령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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