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화하는 김일성. 출처: 통일뉴스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3장 '탈냉전기 대외정책과 대외관계'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1. 북한은 비합리적 행위자인가?

 

 

많은 경우 북한의 대외적 행보나 행태를 묘사할 때 '벼랑끝 외교', '곡예 외교', '롤러코스터 외교' 등의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는 한다.

 

참고로 '벼랑끝 외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상대에게 겁을 주거나 위기를 조성하는 외교 전략으로, 
냉전시기 미·소간 대립에서 양측이 사용했던 외교 전략에서 유래했다.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 행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불확실성, 불예측성, 그리고 비합리성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곡예 외교'는 곡예사가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듯이 외교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롤러코스터 외교'는 외교 당사자의 행태와 분위기가 롤러코스터의 기구와 같이 급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외교 행태를 위와 같이 비슷한 용어들로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북한의 행보가 불규칙적이면서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의 대외정책에서 유일하게 도출해낼 수 있는 하나의 예측 가능한 지점은 바로 북한의

'도발-대화(협상)-도발'로 이어지는 순환적 행보라는 것이다. 

즉, 도발적 행동과 유화적 제스처를 번갈아가며 취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느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대외정책의 유일한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6년부터 2018년 초까지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설전. 출처: 동아일보

불과 얼마 전까지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가 북한의 지도자보다 더 예측 불가한 사람이었으나...

 

이러한 북한 외교의 특징은 전 지구적으로 북한을 '비합리적 행위자'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으나 

북한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가 비합리적 행위자였다면 '어떻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유례없는 

3대 세습 정권이 70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라에 수많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 가족 세습을 시도했던 독재자들이 존재했으나 

북한과 같은 형태로 남아 있는 독재국가는 없다는 것을 염두했을 때, 되려 북한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왔다는 것이 더욱 그럴싸한 가정처럼 보인다.

 

그 어느 독재자 및 국가와 비교해도 가장 비합리적인 국가로 인식되는 북한이 가장 오래 존속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주요 독재자의 비극적인 말로. 오직 북한만이 독재 정권을 이어오고 있다. 출처: 타임

또한 미국 CIA는 2017년 북한의 김정은을 '이성적 행위자'로 판단하며 그 근거로 트럼프와의 설전이 한창일 때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다는 것과 중국의 19차 당 대회 및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기간에 도발을 자제한 것을 

제시했다. 이에 앞서 미 정보 당국자들은 김정은 집권 초인 2012년에도 김정은이 미국에 대한 위협 수위를 끌어올리다가

갑자기 도발을 중지했을 때 처음으로 '그를 '합리적 행위자'로 판단했다'라고 전했다. 

 

2012~2017년까지의 북한 미사일 도발 횟수. 출처:동아일보

따라서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에 있어서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외교정책 및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국가의 '생존'을 도모한다는 것과, '국익'을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북한의 행보를 면밀히 살펴볼 때에야 비로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예측 불가능한 북한의 행보에 미약한 예측이나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북한이 현재까지 추구하고 있는 대외정책·외교정책의 이념 및 기조를 파악하는 것은

향후 북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하며, 이에 따라 아래에서는 북한이 주창하는 대표적 

대외 및 외교 정책의 이념과 기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북한 외교정책의 이념과 기조 

 

조선로동당은 자주, 평화, 친선을 대외정책의 기본리념으로 하여 반제자주력량과 련대성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세계의 자주화와 평화를 위하여, 세계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한다.
조선로동당 규약(2016.5.9)

 

1) 자주·평화·친선 

 

북한은 '자주·평화·친선'을 북한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이자 외교활동의 원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주·평화·친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에 기초한 '자주·친선·평화'를

외교정책 이념이자 방향이라고 밝힌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시 1988년 9월 자주·평화·친선의 순서로 변경됐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북한 대외정책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한 헌법 17조에서는 

'자주, 평화, 친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정책의 기본리념이며 대외활동 원칙이다'라고 명시하여 

조선노동당 규약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주창하고 있다.

 

1988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조선노동당 6차 대회. 김일성과 김정일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통일뉴스

 

상술하였던 것처럼 당시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자주·평화·친선'의 대외정책 이념이

정식화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우리 당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대외활동에서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 협조관계를 발전시키며,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다. 

자주·친선·평화, 이것이 우리 당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 설정의 근저에는 그동안 조선노동당의 지도 이념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주체사상'이 

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노동당 6차 대회는 김정일이 이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등극했다는 것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대회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제기한 '자주·평화·친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우선 '자주'란 

"모든 대외정책을 우리나라의 실정과 우리 인민의 이익에 맞게 독자적으로 결정하며 자신의 판단과 주견에 따라 

외교활동을 벌려나가는 것", "국제관계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혁명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풀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북한은 "민족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역시

다른 나라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친선'에 관하여서는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친선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라며, 

그 대상으로 사회주의 국가, 제3세계 비동맹국가, 그리고 북한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아시아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지목하고 있다.

 

'평화'에 대해서는 "평화와 안전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전쟁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수호할 수 있다"며, 

군사동맹 해체, 해외주둔군 철수, 비핵지대 창성을 구체적인 과제로 제시하였다.

 

2) 국익외교와 혁명외교 

 

각 국가별로 추구하는 목표와 전략들은 상이할 수는 있으나 국가의 생존 및 번영이 공통적·핵심적 국가이익의 범주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북한과 같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경우에는 더더욱 생존의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북한의 외교가 '생존'이라는 국익을 추구하는 성격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북한의 외교는 '분단국 외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과의 '정통성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외교정책 목표가 

설정되며, 이는 다시 궁극적으로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라는 국가목표에 귀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1980년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전국적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고 최종 목적으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 실현'라는

문구를 명시하면서 혁명외교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뒤의 최종 목적은 다시 2016년 개정되어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이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북한이 한반도 공산 통일의 전략을 폐기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혁명운동으로서의 외교'의 기조는 1964년 2월 27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4기 3차 전원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해 북한의 혁명역량뿐만 아니라 남한의 혁명역량과 국제혁명역량을 함께 길러야 한다며, 

이른바 '3대혁명역량 강화노선'을 채택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회의에서 김일성은 국제혁명역량 강화를 위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제3세계 인민들과의 단결, 그리고 중립국 신생독립국들과의 단결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의 일환으로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제10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 참석하였고,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1년 전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채택한 '3대혁명역량 강화노선'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김일성을 맞이하는 수카르노 대통령. 출처: VOA

반둥회의로도 불리는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개최된 회의로 당시 신생 독립국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이른바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으로 확장되면서

제3세계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NAM은 1961년 티토 대통령(유고슬라비아), 네루 수상(인도), 나세르 대통령(이집트),

수카르노 대통령(인도네시아), 엔크루마 대통령(가나) 등 5인의 주도로 창설되었으며, 신생 독립국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제3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 1990년대 이후에는 NAM의 존재감은 약화되었다. 

2010년 기준 NAM에는 118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3) 시계추외교와 갈등적 편승외교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권 국가의 두 강대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갈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펼쳤는데 이를 '시계추외교' 혹은 '갈등적 편승외교'로도 표현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갈등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등극한 흐루시초프가 1956년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함과 더불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서방세계와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을 공표하면서부터 심화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였고 반대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비판하면서 두 국가가 중심이 된

이러한 논쟁은 사회주의권 내에서 1989년 중·소 정상회담 전까지 지속되었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모습. 출처: 중앙일보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내정 개입, 그리고 이후 터져 나온 상술한 중소분쟁을 겪으면서

주체사상(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의 발현이 나타났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과 중국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비동맹 외교로 외연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 확장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 북한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소련과 중국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북한은 이 두 국가의 갈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를테면 북한은 1961년 중국과 소련에 각각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54년부터 63년까지는 균형을 이루면서 중국에 치우치는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신지도부의 등장과 함께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얼어붙게 되었다.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판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북한의

<<노동신문>>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하면서 자주적 외교의 노선을 천명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에서 자주성을 확보하자는 내용의 사설. 출처: 네이버 통일부 블로그

 

이렇듯 북한은 북소관계가 좋을 때는 교조주의(중국)에 대한 비판, 북중관계가 좋을 때는 수정주의(소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느 한쪽으로의 완전한 밀착은 경계하였다. 중소분쟁은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증가시켰고, 북한은 이를 기회로 활용하여 안보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중립성을 자주와 주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탈냉전이 이루어지면서 전과 같은 형태의 편승외교는 보이지 않았으나 북한은 얼마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개인적 친분을 과시하면서 미·중 전략 경쟁의 틈에서 일종의 시계추외교를 행사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바이든 신 행정부의 대북 관여정책이 본격화될 경우 북한의 자주외교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강건택.(2017). "미 정보당국, 김정은은 이성적 행위자라 판단", 연합뉴스, 12월 6일.

국가정보원. (2019). 「북한법령집. 상」. 

북한연구학회. 『북한의 통일외교』. 서울: 경인문화사, 2006.

애나 파이필드 저, 이기동 옮김. 『마지막 계승자』. 서울: 도서출판 프리뷰, 2019.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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