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제1차 지휘관ㆍ정치일꾼(간부) 강습회를 주재하고

변화된 정세에 맞는 군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지만,

핵 무력 등에 대한 언급은 내놓지 않았다

 

김정은은 7월 27일 이른바 ‘전승절’을 맞아 진행된

전국노병대회에서도 핵 억제력에 대한 언급 없이

내부 결속 등만을 강조한 바 있다

 


조선인민군 제1차 지휘관, 정치일군강습회 진행

: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강습회를 지도하시였다

이번 강습회의 주체가

노동당 소속의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로,

정(政)이 아닌 당(黨) 차원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작년 말처럼 당 간부들에게 압박을 넣음으로서

군사기를 진작하고

주민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전 병력이 참가한 듯 보인다

2020년 말 인민무력성에서 국방성으로

명칭이 변경된 국방성은

여전히 그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4ㆍ25문화회관의 이름은

4월 25일에서 유래하였다

4월 25일은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전해진다

본래 1948년 2월 8일 창설되었으나,

1978년부터는 항일 빨치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강조하기 위하여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하였다는 날인

1932년 4월 25일로 창설 시기를 앞당겼고,

해당 날짜를 ‘건군절’로 지정하여 공식화하였다

북한의 명예위병대

한국의 육해공군 3군 합동의장대에 해당한다

지난 2000년과 2007년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북한군 명예위병대를 사열하였으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자

북한군 명예위병대는 조선인민군가에 맞춰

분열식을 거행하고 예포를 쏘았다

기사 내내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다

당 간부들이 김정은에게 충성의 마음을 담아

경의를 표했다고 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충성심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박정천, 권영진, 리영길 등 간부의

정치적 위상에 변함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리영길은 폐막식 장면에서

김정은을 향하여 주석단과 방청석의 참석자 전원이

기립하여 박수를 치는 가운데

리영길 혼자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앉아 있다가 남들보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과정이 포착되었다

따라서 그 위상의 변화에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당장은 아니지만 공포정치가 재개된 상황에서

리영길이 다시 실수한다면

가중처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경제건설총력집중노선”과 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그간 경제에 많은 힘을 쏟았기 때문에,

군사기를 진작할 목적으로 강습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4대 군사노선은 북한이 1960년대 초에 제시한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를 의미하며,

이후 군사력 증강을 위한 기본노선이 되었다

 

이에 김정은은 ‘4대 강군화 노선’을 제시하여

정치사상 강군화, 도덕 강군화,

전법 강군화, 다병종 강군화를 내세웠다

이는 최근 북한 내부에서

식량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군 비축미 등을 활용할 데 대한

당의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정은은 올해 초

군량미와 전쟁 비축미를 풀라고

특단의 조치를 내렸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6월 말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군 수뇌부 문책으로 내부 단속 고삐를 죄었고,

이후 남북 및 북미 관계 국면에서

기선을 잡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는 분석이 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조선인민군 제1차 지휘관,

정치일군강습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여기에서 뜨락이란

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를 의미하는 것으로,

북한에서는 청사 앞 광장을

뜨락이라고 일컫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애로운 스승의 강렬한 정’이라는 문구를 통해

인민대중제일주의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본래 ‘수령결사옹위정신’을 강조하던 북한에서

당중앙결사옹위’라는 표현을 활용하였다

‘당중앙’은 최고지도자의 별칭으로

당 중앙위원회의 준말로도 쓰인다

기사의 말미에 ‘충성의 맹세’라는 표현을 통하여

결국 이 글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선전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기사에 첨부된 사진을 보면

박수를 받는 김정은 뒤로

박정천과 권영진이 보인다

 

현재 박정천은 총참모장이고

권영진은 총정치국장이다

 

뒤쪽으로 흰색, 네이비색 군복이 눈에 띄는데,

해군과 항공 및 반항공군(공군)의 정복으로 보인다

 

한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되었던

리병철은 7월 28일 북중 친선의 상징인

우의탑을 찾아 헌화할 때 복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 정치일군강습회에서는

그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모자에 붉은 띠가 있는 사람들이

맨 앞줄에서 김정은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붉은 띠의 사람들이 군 서열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자에 붉은 띠가 있는 사람들은

소매에도 붉은 띠가 붙어있다

 

또한,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과 박정천, 권영진은

네이비색 바지를 입고 있고

끝 사람들이 국방색 바지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네이비색 바지의 서열이 더 높아보인다


【 참고문헌 】

 

김도균, (2018). “‘대통령 각하!’ 문 대통령 맞이한 북한군, 의장행사도 달랐다”, 오마이뉴스, 9월 18일.

김명성, (2021). “김정은에 기립박수 때 홀로 딴짓…北리영길 불경죄 처벌받나”, 조선일보, 8월 4일.

노동신문, (2021).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조선인민군 제1차 지휘관, 정치일군강습화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7월 30일.

노동신문, (2021). “조선인민군 제1차 지휘관, 정치일군강습회 진행: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강습회를 지도하시였다”, 7월 30일.

박은경, (2021). “북한, 통신선 복원부터 김여정 담화까지…일주일 새 대외 행보 ‘가속도’”, 경향신문, 8월 2일.

손재호, (2021). “‘좌천’ 리병철, 다시 김정은 옆자리로…軍서열 1위 복귀”, 7월 30일.

 

나무위키, https://namu.wiki , ‘조선인민군’ (검색일: 2021년 8월 5일)

네이버 지식백과, terms.naver.com, ‘뜨락’ (접속일: 2021년 8월 5일)

 

 

※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5장 '핵무력과 경제건설의 딜레마'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북한군의 정식 명칭인 '조선인민군'은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같은 해 2월 8일에 지금의 '조선인민군'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군사 조직은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을 점령했던 소련에 의해 생겨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창군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202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행진하는 조선인민군의 모습


1. 조선인민군 창군과 한국전쟁

 

상술했듯이 조선인민군은 1945년 해방 후 소련 점령군에 의해 조직되었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보안 조직들이 나타났었는데, 소련은 이러한 조직들을 해체·정비하고

'보안대'들을 창설하였다. 1946년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자체 군사력 확보를 위해 

'보안간부훈련대대본부'와 '보안간부훈련소'를 창설하였고, 전자는 이듬해 5월 17일 임시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산하의 

'북조선인민집단군 사령부'가 되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2개 보병사단과 1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공표하였고, 총사령관으로 최용건, 총참모장으로 강건을 임명하였다.

 

최용건 초대 조선인민군 사령관의 모습.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조선인민군은 소련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소련식 편제를 모방하여 계급제도를 확립했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출발했던 조선인민군은 1949년 4개 사단으로 증편되었고, 광범위한 징병을 바탕으로 

1950년 6월까지 3개 사단을 추가로 편성하게 된다. 

 

조선인민군은 창군 이래로 계속해서 군사력의 확장을 꾀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에 비해 신속한 국가 건설 과정과 경제성장의 이점에

힘입어 소련의 동의와 군사차관을 얻어냄으로써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한반도 무력 통일을 시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총병력은 10개 사단(7개 전선 배치, 3개 예비), 1개 전차여단, 2개 독립연대,

3개 내무성 경비여단 및 소규모의 해·공군 등으로 구성된 13만 5천 명 이상이었다. 

이는 남한 병력 9만 8천 명을 압도한 수치였으며, 조선인민군은 당시 남한 군대에는 없었던 중장비(전차·항공기 등)를 

보유하고 있었다. 압도적 전력차와 더불어 조선인민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한국전쟁 초반에는 북한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나, UN 등의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인해 양측은 지금의 휴전선을 경계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소모전을 계속하였고, 1953년에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정전이 체결된 후 남북한 모두 본격적으로 군비증강을 계속하였는데, 조선인민군은 1953년 7월 정전 무렵의

27만 5천 명~31만 명에서 1955년까지 41~42만 명으로 증강하였다. 또한 1959년 2월 정규군 조직 이외에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하는 민병 조직인 '노농적위군(당시 대)'를 창설하게 된다.

 

 

북한 국가우표발행국이 노농적위군 창건 55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새 우표. 출처 : 통일뉴스

※ 노농적위군

 

노농적위군은 1959114일 창설된 북한 최초의 민간군사조직이다.

평상시에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면서 민방위 업무를 수행하고,

유사시에는 군과 함께 지역 방어임무와 같은 정규군 보충 및 군수품 수송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만 17~60세까지의 남성과 미혼여성 중 교도대 미편성자와 노동자/농민/사무원(남자 위주) 등을 대상으로

직장 및 행정단위별로 편성되어 총 대원이 약 570만여 명에 이르는 규모면에서 가장 큰 군사조직이다.

 

 

2. '국방에서의 자위'와 군사력 증강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 강화를 위해 북한은 지속적으로 움직여왔다.

특히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를 결정하고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국방의 자위'와 이를 위한 '경제·국방건설 병진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66년 북한은 본격적인 군비 확충에 나서게 됐는데, 그 이면에는 

1965년 미국의 월남전 확전과 한·일 국교정상화 및 한국의 경제성장이 북한에 안보위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66년의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북한은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 '전군간부화' 및 '전군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확립하고, 경제·군사건설 병진책을 재천명하게 되었다.

 

* 4대 군사노선에 대해서는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1.2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권력 기구> 3. 군 조직

 

또한 주체사상의 한 기둥으로 '국방에서의 자위'를 천명하고, 군의 현대화 방침을 내세움으로써 그 결과

국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1961~1966년 사이 평균 19.8%에서 1967~1971년 사이에 평균 30.9%로 

약 1.5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군비 지출은 자원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으며, 

북한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북한의 GDP 대비 군비 지출은 2006년부터 2016년 동안 약 23.3%를 기록하며 11년 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2016 세계 군비지출 보고서)

 

그럼에도 북한은 4대 군사노선으로 집약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인민적 전국가적 방위체계'를 수립하고, 이를 통한 ①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보위한반도 무력 통일이라는 

두 가지 국방정책의 목표를 강조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화를 통해 당시 남북한의 기준으로 현대적인 

MIG-21 전투기, SU-7 전폭기 등 수백 대의 항고기, SA-2 대공미사일, 잠수함 등을 소련으로부터 도입함으로써

한국에 비하여 질적으로 우월한 군사 전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72년부터 1984년 사이에는 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으로부터 이렇다 할 신예 항공기나 미사일 도입은 없었는데,

이는 북한의 막대한 군비 지출에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현대화'가 1970년 초까지 어느 정도 기반을 

정비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1980년대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증강'에 대처하여 한반도의 군비경쟁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 혹은 최소한 균형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1980년 초 김정일은 기계화부대의 병참을 강조하며, 

수천 문의 자주포를 양산하고, 낙후된 공군력 및 방공 능력의 현대화를 꾀했다.

 

그러나 북한은 점차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질적 군비증강에 필적할 수 없게 되어 

'노동집약적 군비경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과 경쟁할 수 없음에도 군사 병력을 

100만 대군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아래는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한 표이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 출처: 2020 국방백서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은 경제난으로 인해 병력 증강 이외의 군비 증강 혹은 

'재래색 군비 증강'이 여의치 않게 되자 경제적 부담이 큰 재래색 군사력의 현대화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전략무기의 확보에 힘쓰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억지력 증강이라는

이른바 '비대칭적 군비경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북한은 비대칭적 무기의 대표인 핵을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의 시점에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핵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2.27 - [북한의 동태] - [2020년 12월] 북핵

 

북한의 국력으로는 재래식과 비재래식 군사력을 모두 동시에 강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재래식·비대칭 전력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최근 개발에 성공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을 비롯한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최근 들어 경제난 타개를 위한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한 가운데, 북한의 군사력 증강 행보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비대칭 전력의 강화 여부 때문이며, 철저한 대비를 위해서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국방부. (2020). 「2020 국방백서」.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 CONTETNS ::

Ⅰ. 머리말

Ⅱ. 북한의 위기와 선군

Ⅲ. 조선노동당의 당군

Ⅳ. 맺음말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승계과정에서

군권의 이양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이전,

김정일은 이미 1970년대부터 수십 년간

조선노동당의 조직지도부를 통하여

당ㆍ정ㆍ군을 통제해 왔다

마지막 권력승계는

공식적인 군권장악으로 이루어졌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물려받았고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임명되었으며,

1993년 국방위원장에 취임하였다

 

2008년 김정일의 건강악화설 이후

2010년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됨으로써,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공표하였다

북한의 권력승계에서

군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권력승계는 신속히 진행되었으며,

김정은은 정권을 장악한 후

‘은하 3호(대포동-3)’ 발사 성공,

3차 핵실험 강행 등

핵 무력을 이용한 리더십을 과시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어떻게 군권이

북한에서 권력을 상징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조선노동당의 당군인 조선인민군의

현황 및 조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의 기원과 성장 과정,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를

차례로 진행할 예정이다


Ⅱ. 북한의 위기와 선군

 

1990년대 소련의 몰락으로 인한

사회주의 경제협력의 약화는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93년 연장한 제3차 7개년계획도

달성하지 못하였다

 

경제침체는 1990년대 가속화되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북한은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체계적 비전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8차 당대회에서 ‘자력갱생 노선’을

고수할 뿐이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당의 배급체계는 흔들렸고,

배급을 바탕으로

주민을 통제ㆍ지도하던 체제도 붕괴되었다

1995~1998년 사이에는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지 않아

국가예산조차 공표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처럼 탈냉전기

북한의 당ㆍ정은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군과 보안기관 등

통제기구는 도리어 강화되었다

 

김정일은 1998년

‘사회주의 강성대국론’을 내세워

국가안보 분야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내외적인 생존전략의 핵심은

군사력의 활용을 포함한

군사적 방법이었다

 

1990년대 전후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직면한

북한 지배집단은 체제안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군에 대한 절대적 통제를

무엇보다 중시하게 되었다

국내 정치적ㆍ경제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국가와 체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군사력을

정권 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이 비군사적인 영역에서도

사회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군사선행’, ‘군사중시’ 등의 용어를 내세우며

새로운 통치담론을 제기하였다

 

군을 경제사업과 사회통제에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불가피한 국정운영방식은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선군정치는 《노동신문》에 의하여

가장 발전된 정치형태라고 선전되었고,

김정일의 통치방식으로 부각되었다

 

선군정치 :: [ 주체사상 ③ ] 김정일의 선군정치론과 강성대국론 :: 북한헤럴드 (tistory.com)

 

이렇듯 선군정치는 위기에 직면한

북한의 생존전략이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체제 안정을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Ⅲ. 조선노동당의 당군

 

북한의 국방위원회는 1972년부터 2016년까지

운영되었던 기관으로,

김정은이 국무위원회를 신설하며 폐지되었다

따라서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인

국방위원장의 역할도 국무위원장이 대체하였다

 

조선인민군이 가진 당군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국방위원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국방지도기관’으로,

북한 헌법에 의하면

국방위원장은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으로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ㆍ통솔한다고 되어있다

 

국방위원회 소속인

인민무력부, 인민보안부, 국가안전보위부,

제2경제위원회 등은

내각 산하의 일반 경제ㆍ행정 부서에 비하여

정책결정과 자원배분에서 우선권을 가졌다

 

당조직의 관료화와

김일성ㆍ김정일에 의한 사인화로 인하여

당중앙위, 당중앙군사위, 정치국 등

협의ㆍ의결기구는 유명무실해졌다

이 상황에서 집행기구인 중앙위 비서국의

실무 부서들이 실권을 갖게 되었다

 

비서국의 군사부가 군사 업무에 대한

지도감독을 담당하였고,

조직지도부가 군의 정치 사업에 대한

당적 지도를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기계공업부와 선전선동부도

부문별로 사업을 지도ㆍ감독하였다

 

특히 인민군 당위원회의

집행기관인 총정치국에 대한

당중앙위의 지도와 통제는

비서국의 부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총정치국을 전담하는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13과는

북한군 지휘관과 정치 간부들의

당 생활을 지도ㆍ통제하며,

간부4과가 정치군관들의 인사를 결정하였다

 

당중앙위보다 그 집행기구인

비서국에 실권이 있었듯,

군당위원회보다 그 집행기구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산하 각급 당위원회의 정치부가 실권을 가졌다

 

2010년 개정된 당규약은 군대 내 당조직인

총정치국의 위상을

중앙당 부서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켜

군대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당의 사인화에 따라 ‘당군’이

최고지도자 ‘사병’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총정치국의 지위를 강화하며

군의 당적 통제에 관여하였으며,

‘당중앙’이라는 신분으로

당ㆍ정ㆍ군에 대한 지배력을 키웠다

 

특히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공표된 이후 수십년간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통하여

군을 장악하여 왔다

북한체제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 중 하나인

조직지도부는 부장 없이

제1부부장들만 있는

김정일의 직할 조직이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군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된 이후였다

이후 1991년 제6기 19차 당중앙위 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하여

600여 명의 장령급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고,

25일 창군기념행사에서는 직접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열병보고를 받아

위세를 떨치었다

 

또한 1992년 개정 헌법에서는

국방위원회의 지위와 권한을 격상시키고

국방위원장을 주석과 분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국방위원장에 선출됨으로써

김일성 생존 당시에도

최고군통수권자로서의 지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및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당ㆍ정ㆍ군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현재 김정은 역시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중요 군사정책과 군 간부 인사권을 행사한다

또한 ‘국무위원장’으로

국가의 무력기구인 국방성(舊 인민무력부),

사회안전성(舊 인민보안부),

국가보위성(舊 국가안전보위부)를 지도하며,

‘최고사령관’으로 군대를 직접

지휘ㆍ지도하고 있다


Ⅳ. 조선인민군의 조직

 

북한은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방성(舊 인민무력부)이

국방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실제로 인민군 창건 이래

역대 민족보위상과 인민무력부장이

군의 최선임자였다

 

1978년 말 총정치국장 오진우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래

총참모부와 총정치국으로 많은 권한이 옮겨갔다

오진우는 거의 20년간

무력부장 자리(1976~1995)에 있었으나,

그의 지위가 공고하였던 것은

김일성ㆍ김정일의 신임에 힘입어

상당 기간 총정치국장을 겸임하였기 때문이다

 

오진우 사망 이후 인민무력부(現 국방성)는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형식상의 군정기관으로 바뀌었다

군 간부의 인사문제 등 주요한 군정권은

정치사업의 명목으로 총정치국이 행사하였다

 

김정일 체제 하에서는

국방위원회 및 각종 주석단 서열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보다 서열이 높았다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에서도

총정치국장을 맡은 최룡해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부 안의 동요가 있을 수 있으나

당군에 대한 통제가 철저하게 관철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편 국방위원회는 명목상의

‘최고국방지도기관’으로서,

당중앙위ㆍ당중앙군사위의 당적 지도를 받았다

2004년 김정일이 지시한 <전시사업세칙>에도

당중앙군사위가 항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내각, 인민보안부 순으로 임무를 규정하였다

 

2010년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하여

당중앙군사위가 재정비되었고,

특히 김정은은 국방위원회가 아니라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후계자임이 공표되었다

이는 새로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를 통하여

국방위원회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할 것임을 의미하였다

 

군령권은

전시에는 최고사령부가

인민군, 인민경비대, 예비병력 등 기타 무장력을

모두 지휘하나,

평시에는 총참모부가 군령기관으로서

전군의 군사 업무를 관장한다

 

인민군은 소련의 전통을 받아들여

육ㆍ해ㆍ공 통합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총참모부는 산하의 작전국ㆍ정찰국ㆍ

전투훈련국 등 수십 개 전문 부서를 통하여

전후방군단, 평양방어사령부,

해군사령부, 공군사령부 등에 군령권을 행사한다

 

총참모부가 막강한 군령권을 지닌 듯 보이나,

주요 군정 기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

총정치국이 군령권에도 개입한다

1969년 이래 각급 부대의 작전명령서에

군사지휘관들과 함께

정치위원이 서명함으로써 효력을 갖게 되는

군의 이원적 지휘체계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68년 군수뇌부의

대규모 숙청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군벌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군을 막강한 세력으로 키워

당의 통제 아래 두고,

최고지도자 자신에 대한 충성을

담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철저한

‘분할통치(divine and rule)’ 방식을 구사하였다

 

인민군은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총참모부가

각각 국방위원회와 최고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삼중 통제체제를 갖게 되었다

 

나아가 2000년대에는

방첩ㆍ비밀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보위사령부(現 보위국)도 권한이 커졌다

인민군은 보위사령부는 물론

외부의 국가안전보위부(現 국가보위성)와

인민보안성(現 사회안정성)에 의한

공개ㆍ비공개적 삼중 감시를 받았다

 

과거 인민무력부가 기능적으로 나뉘었듯,

총참모부 역시 분할되어 있다

전시에 가동하여야 할 최고사령부가

평시에도 존재하며,

최고사령관이 총참모부 작전국에

직접 명령을 내기리도 한다

김정일 때에는 작전국장이

현지지도를 빈번하게 수행하였다

 

총참모부가 관할하는 육ㆍ해ㆍ공

작전부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편찬한

『2020 국방백서』에 따르면

인민군 지상군은 10개의 정규 군단,

기계화군단 2개, 제91수도방어군단,

평양고사포사령부,

특수부대를 관장하는 11군단,

기갑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은

육군 100만, 해군 6만, 공군 11만 등

총 128만 명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병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은 의무제 17세 입대를 제도화하였다

 

1990년대부터 사병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되었고,

제대자들은 한국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교도대에 편입된다

 

예비 병력은 준군사력

(사회안전성, 속도전청년돌격대 등) 40만,

교도대 60만 외에

노농적위군 570만,

붉은청년근위대 100만 등이 지역별로 편성되어

762만의 동원 체제를 구성한다

이 중 교도대와 일부 근위대 인원이

유사시 현역병으로 동원될 가능성이 있다

 

직업군인의 경우,

인민군 수뇌부의 고령화 현상

현저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 김정일은

군의 사기ㆍ충성심을 진작하고

군 원로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원수ㆍ차수 등 여러 차례의 대규모

계급승진을 단행하였다

 

선당정치를 표방하는 김정은은

집권 초 군수뇌부를 자주 숙청하고

군 간부의 상당수를 세대교체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2020년 리병철과 박정철에게

원수 칭호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북한의 군권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

선군정치의 등장 배경,

조선인민군의 조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본

북한 당국은 생존전략으로

군사력을 내세우고,

이를 정권 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었다

이에 따라 군은 사회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강력한 힘이 주어졌다

 

김일성ㆍ김정일 1인 집권체제로 변모하며,

당군이었던 조선인민군은

최고지도자의 사병으로 전락하였다

김정일은 군을 체계적으로 장악하였고,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이미 군권 승계를 마무리하였다

김정은 또한 국무위원장과 최고사령관을 겸하며

군대를 통솔하고 있다

 

한편 국방성은 산하 기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군정기관으로 바뀌었다

군정권은 총정치국이 행사하고,

군령권은 총참모부가 행사하게 되었다

 

총정치국장이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보다

서열이 높다

그렇기에 총참모부가 가진 군령권에

총정치국이 개입하여

이원적 지휘체계가 수립되었다

 

총참모부가 육해공 작전부대를 관할하는데,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복무 기간이 늘어났다

직업군인의 경우 고령화 현상이 현저하나,

김정은은 세대교체를 단행하고 있다


【 참고문헌 】

 

국방부. 『2020 국방백서』. 국방부, 2020.

임병선, (2020). “북 연말까지 ‘80일 전투’ 전개하기로, 리병철ㆍ박정철에게 원수 칭호”, 서울신문, 10월 6일.

장달중,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20, pp.187-200.

통일부 통일교육원. 『북한 지식 사전』. 통일부, 2016.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국방위원회’ (접속일: 2021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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