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게시물은 『현대 북한학 강의』 제5장 '핵무력과 경제건설의 딜레마'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북한군의 정식 명칭인 '조선인민군'은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같은 해 2월 8일에 지금의 '조선인민군'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군사 조직은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을 점령했던 소련에 의해 생겨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창군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난 202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행진하는 조선인민군의 모습


1. 조선인민군 창군과 한국전쟁

 

상술했듯이 조선인민군은 1945년 해방 후 소련 점령군에 의해 조직되었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보안 조직들이 나타났었는데, 소련은 이러한 조직들을 해체·정비하고

'보안대'들을 창설하였다. 1946년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자체 군사력 확보를 위해 

'보안간부훈련대대본부'와 '보안간부훈련소'를 창설하였고, 전자는 이듬해 5월 17일 임시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산하의 

'북조선인민집단군 사령부'가 되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2개 보병사단과 1개 혼성여단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공표하였고, 총사령관으로 최용건, 총참모장으로 강건을 임명하였다.

 

최용건 초대 조선인민군 사령관의 모습.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조선인민군은 소련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소련식 편제를 모방하여 계급제도를 확립했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출발했던 조선인민군은 1949년 4개 사단으로 증편되었고, 광범위한 징병을 바탕으로 

1950년 6월까지 3개 사단을 추가로 편성하게 된다. 

 

조선인민군은 창군 이래로 계속해서 군사력의 확장을 꾀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에 비해 신속한 국가 건설 과정과 경제성장의 이점에

힘입어 소련의 동의와 군사차관을 얻어냄으로써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한반도 무력 통일을 시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총병력은 10개 사단(7개 전선 배치, 3개 예비), 1개 전차여단, 2개 독립연대,

3개 내무성 경비여단 및 소규모의 해·공군 등으로 구성된 13만 5천 명 이상이었다. 

이는 남한 병력 9만 8천 명을 압도한 수치였으며, 조선인민군은 당시 남한 군대에는 없었던 중장비(전차·항공기 등)를 

보유하고 있었다. 압도적 전력차와 더불어 조선인민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한국전쟁 초반에는 북한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나, UN 등의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인해 양측은 지금의 휴전선을 경계로 서로 뺏고 빼앗기는 

소모전을 계속하였고, 1953년에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정전이 체결된 후 남북한 모두 본격적으로 군비증강을 계속하였는데, 조선인민군은 1953년 7월 정전 무렵의

27만 5천 명~31만 명에서 1955년까지 41~42만 명으로 증강하였다. 또한 1959년 2월 정규군 조직 이외에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하는 민병 조직인 '노농적위군(당시 대)'를 창설하게 된다.

 

 

북한 국가우표발행국이 노농적위군 창건 55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새 우표. 출처 : 통일뉴스

※ 노농적위군

 

노농적위군은 1959114일 창설된 북한 최초의 민간군사조직이다.

평상시에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면서 민방위 업무를 수행하고,

유사시에는 군과 함께 지역 방어임무와 같은 정규군 보충 및 군수품 수송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만 17~60세까지의 남성과 미혼여성 중 교도대 미편성자와 노동자/농민/사무원(남자 위주) 등을 대상으로

직장 및 행정단위별로 편성되어 총 대원이 약 570만여 명에 이르는 규모면에서 가장 큰 군사조직이다.

 

 

2. '국방에서의 자위'와 군사력 증강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 강화를 위해 북한은 지속적으로 움직여왔다.

특히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를 결정하고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국방의 자위'와 이를 위한 '경제·국방건설 병진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66년 북한은 본격적인 군비 확충에 나서게 됐는데, 그 이면에는 

1965년 미국의 월남전 확전과 한·일 국교정상화 및 한국의 경제성장이 북한에 안보위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66년의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북한은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 '전군간부화' 및 '전군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확립하고, 경제·군사건설 병진책을 재천명하게 되었다.

 

* 4대 군사노선에 대해서는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1.29 - [북한의 정태/정치] - <북한의 권력 기구> 3. 군 조직

 

또한 주체사상의 한 기둥으로 '국방에서의 자위'를 천명하고, 군의 현대화 방침을 내세움으로써 그 결과

국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1961~1966년 사이 평균 19.8%에서 1967~1971년 사이에 평균 30.9%로 

약 1.5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군비 지출은 자원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으며, 

북한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북한의 GDP 대비 군비 지출은 2006년부터 2016년 동안 약 23.3%를 기록하며 11년 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2016 세계 군비지출 보고서)

 

그럼에도 북한은 4대 군사노선으로 집약된 '국방에서의 자위'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인민적 전국가적 방위체계'를 수립하고, 이를 통한 ①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보위한반도 무력 통일이라는 

두 가지 국방정책의 목표를 강조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화를 통해 당시 남북한의 기준으로 현대적인 

MIG-21 전투기, SU-7 전폭기 등 수백 대의 항고기, SA-2 대공미사일, 잠수함 등을 소련으로부터 도입함으로써

한국에 비하여 질적으로 우월한 군사 전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72년부터 1984년 사이에는 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으로부터 이렇다 할 신예 항공기나 미사일 도입은 없었는데,

이는 북한의 막대한 군비 지출에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현대화'가 1970년 초까지 어느 정도 기반을 

정비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1980년대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증강'에 대처하여 한반도의 군비경쟁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 혹은 최소한 균형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1980년 초 김정일은 기계화부대의 병참을 강조하며, 

수천 문의 자주포를 양산하고, 낙후된 공군력 및 방공 능력의 현대화를 꾀했다.

 

그러나 북한은 점차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질적 군비증강에 필적할 수 없게 되어 

'노동집약적 군비경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과 경쟁할 수 없음에도 군사 병력을 

100만 대군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아래는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한 표이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 출처: 2020 국방백서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은 경제난으로 인해 병력 증강 이외의 군비 증강 혹은 

'재래색 군비 증강'이 여의치 않게 되자 경제적 부담이 큰 재래색 군사력의 현대화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전략무기의 확보에 힘쓰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억지력 증강이라는

이른바 '비대칭적 군비경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북한은 비대칭적 무기의 대표인 핵을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의 시점에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핵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

2020.12.27 - [북한의 동태] - [2020년 12월] 북핵

 

북한의 국력으로는 재래식과 비재래식 군사력을 모두 동시에 강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재래식·비대칭 전력 강화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최근 개발에 성공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을 비롯한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최근 들어 경제난 타개를 위한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한 가운데, 북한의 군사력 증강 행보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비대칭 전력의 강화 여부 때문이며, 철저한 대비를 위해서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국방부. (2020). 「2020 국방백서」.

장달중 외. 『현대 북한학 강의』. 서울: 사회평론, 2013.

통일교육원. (2016). 「북한 지식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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